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도토리들 / 환장하겠다 - 이봉환

석전碩田,제임스 2023. 8. 30. 11:26

도토리들 

- 이봉환

어디 가을이 얼마큼 왔나 궁금해 산에 갔더니 

​키 작은 졸참나무 도토리들 바위틈에 수월찮이 나앉아서 
꼭 포경수술 한 동무지간들 목욕탕에서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운동 나온 아낙이 흘끔 보거나 말거나 
큰놈 작은놈들 거시기가 밖으로 볼똑하니 나오도록 앉아서 

​가을볕 따글따글하니 쬐고들 있습디다요 

- 시집 <밀물결 오시듯>(실천문학사, 2013)

* 감상 : 이봉환 시인.

1961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습니다.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나 전교조 파동이 있었을 당시 해직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1988년 진보적 문예지 <녹두꽃 1집>에 ‘해창만 물바다’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첫 시집 <조선의 아이들은 푸르다>(녹두, 1990)를 내고,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인 <해창만 물바다>(풀빛, 1991), <내 안에 쓰러진 억새꽃 하나>(두리, 1992)를 통해서 억압당하는 민중의 아픔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참여시 운동에 참여했던 시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 번째 시집 이후 시인은 길고 긴 침묵 속에 빠졌습니다. 

런 그가 다시 시집을 낸 것은 22년이 지난 2013년, 오늘 감상하는 시가 수록된 시집 <밀물결 오시듯>(실천문학사, 2013)이었습니다. 세상에 다시 나온 시인은 여전히 민중과 사람, 특히 자신이 몸 담고 있는 ‘학교’라는 삶 속에서 만나는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여전히 변치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후 다섯 번째 시집 <응강>(반걸음, 2019)과 지난해 정년퇴임 바로 직전에 펴낸 여섯 번째 시집 <중딩들>(푸른 사상, 2022. 2월)을 통해, 이념과 투쟁의 세계관으로 삶을 바라본 20년 전과는 다르게, 삶을 한층 더 깊이 바라보는 눈으로 변함없는 전라도 사투리의 맛깔스러운 표현과 육담, 그리고 웃음과 풍자적인 시어로 삶의 구석구석을 어루만지는 시편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평생 ‘교사 시인’이라고 불렸던 이봉환 시인은 30여 년간 전남 지역에서 국어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지난해 2022년 8월 말, 무안 청계중학교를 마지막으로 정년 퇴임하였습니다.

의 시를 읽으면 현실의 무게를 비트는 해학과 풍자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는 묘한 쾌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면 마치 부지불식간에 숨겨진 어떤 가시에 찔린 듯 몸서리쳐지는 씁쓸함과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이고 맙니다. 우리 말의 맛을 제대로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시인의 탁월한 시적 상상력이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소재들과 버무려져서 맛있는 ‘비빔밥 시’를 만들어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딱 이맘때쯤 가을 산을 오르면 만날 수 있는 튼실하게 영글어 있는 졸참나무의 도토리들이 한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만의 특유의 맛깔스러운 ‘시어(詩語)’로 버무려 낸 시입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꼭 포경수술 한 동무지간들’ 꼬맹이들이 ‘목욕탕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서로 자기 것이 이쁘게 수술이 잘 되었다고 자랑하는 모습 같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직 익지 않은 파란 도토리들이 영락없이 꼬맹이들의 고추처럼 생겼다는 발상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은근슬쩍, 그 모습을 시적 화자인 시인 자신만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 나온 아낙이 흘끔 보’는 것을 독자들이 상상하게 함으로써 시적 은유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어휘들, 가령 ‘수월찮이’ ‘거시기’ ‘따글따글하니’ 등을 자연스럽게 썼을 뿐인데 멋진 한 편의 시가 되어버렸다고나 할까요.

도현 시인은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모악, 2019)이라는 시선집에서 이봉환 시인의 이 시를 이렇게 멋지게 소개했습니다.

[바위틈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들이 생김새를 “포경수술한 동무지간들”로 바라보는 데서 비유가 발생한다. 비유는 이렇듯 실제와 전혀 다른 국면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에게 새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이 익살스러운 광경을 더욱 맛깔나게 하는 것은 남도에서 주로 쓰는 싱싱한 어휘들이다. 도토리들이 수월찮이, 거시기가 밖으로 볼똑하니 나오도록 앉아서 볕을 따글따글하니 쬔다는 말은 얼마나 차지고 옹골진가. 말맛이 살아 있어야 시가 된다.]

인의 같은 시집에 수록되어있는, 말맛이 그대로 살아 있는 시 하나를 더 읽어보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인은 평생을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가 퇴임하기 전에 낸 시집 <중딩들>에는 시인의 삶의 현장인 ‘학교’에서 만난 학생들과 동료 교직원을 실명그대로 등장시켜 살아있는 언어로 묘사한 시 작품들이 여럿 있는데, 이 시집이 나오기 훨씬 전에 씌어진 이 시도 바로 그 학교 현장에서 건져 올린 웃음이 빵 터지는 시입니다. 

환장하겠다

- 이봉환​

한 머스마가 달려오더니 급히 말했다
선생님 ‘끼’로 시작하는 말이 뭐가 있어요?
끼? 쫌만 기다려
나는 사전을 뒤졌다 ‘끼니’가 얼른 나왔다
녀석은 단어를 찾는 동안 신이 나서 지껄인다
서연이하고요 끝말잇기를 했는데요 걔가 ‘새끼’라고 하잖아요
곧 내가 말했다 응, ‘끼니’라고 그래라
녀석이 환해져서 달려갔다가 껌껌한 얼굴로 금방 다시 왔다
선생님, 그 새끼가요 ‘니미씨팔’이라는데요?

- 시집 <밀물결 오시듯>(실천문학사, 2013)

나저나 끝말잇기에서 이기려고  ‘니미씨팔’ 다음에는 어떤 단어가 오는지 ‘그 머스마’는 분명히 또 물어봤을 텐데, 이봉환 선생님의 답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글을 이 시인이 읽는다면 분명 이렇게 댓글을 달 것 같기도 합니다. ‘궁금하면 500원!’이라고.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