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시
- 김해자
소나기 몇 줄금 지나간 어스름 옥수수 몇 개 땄지요 흘러내리는 자주와 갈빛 섞인 수염, 아무렇게나 겹겹 두른 거친 옷들 한 겹 두 겹 벗기다 그만 그의 연한 병아리 빛 속 털 보고 만 것인데 무게조차도 없이 그저 지그시, 알알이 감싸고 있는 한없이 보드라운 속내 만지고 만 것인데요, 진안 동향면 지나다 왜가리 숲 아주 오랫동안 바라본 적 있어요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왜가리들, 꼼짝 않고 있는 새들은 모두 알을 품고 있었죠 폭우가 쏟아져도 한 자리에서 지그시, 입과 날개 거두고 지그시, 소중한 것 깊이 품어본 자들은 알죠 왜 한없이 엎드릴 수밖에 없는지, 왜 한사코 여리고 보드라워질 수밖에 없는지, 왜 하염없이 그를 감싸줄 수밖에 없는지, 사랑은 그런 것이다, 지그시 덮어주는 일에 골몰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사랑이다, 혼자 중얼거리며 온갖 생각도 지우고 지그시, 중얼거림도 멈추고 그냥 지그시
- 시집 <집에 가자>(삶창, 2015)
* 감상 : 김해자 시인.
1961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목포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조립공, 시다, 미싱사, 학습지 배달, 학원 강사 등을 전전하며 노동자들과 함께 시를 썼습니다.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마흔 살의 나이에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는 <무화과는 없다>(실천문학사, 2001), <축제>(애지, 2007), <집에 가자>(삶창, 2015), <해자네 점집>(걷는 사람, 2018), <해피 랜드>(아시아, 2020)가 있으며, 민중 구술집 <민중열전 - 당신을 사랑합니다>(삶이보이는 창, 2012)와 산문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아비요, 2013),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한티재, 2022), 시평 에세이집 <시의 눈, 벌레의 눈>(삶창, 2017) 등을 펴냈습니다.
전태일 문학상(1998), 백석문학상(2008), 이육사 시문학상(2016),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문학상(2018), 구상 문학상(2018), 허난설헌 시문학상(2021)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시인은 16년 전 서울을 떠나 광덕산 자락인 천안 사구실 마을 평평골에서 농사꾼으로 살고 있으면서, 문학 강의도 하고 또 환경 생태 교육도 하면서 시인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현재 <경향신문>에 연재되는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코너에 매달 한 번씩 글을 싣고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지난 6월, 2판 인쇄를 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집에 가자>에 실린 시입니다. 시인은 그녀의 첫 시집 <무화과는 없다>에서 ‘꽃 없는 과실이 어디 있으랴’고 노래하면서 모든 존재는 ‘꽃을 숨기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때부터 하찮고 초라한 것들,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을 소중한 존재로 드러나게 하고 그들을 향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스스로 꽃 피우게 만드는 일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사명이며, 또 그런 삶 속에서 건져 올리는 소중한 이야기들이 ‘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몸이 ‘현재 진행형 동사’로 살아온 시인입니다. 그런 면에서 세 번째 시집에 실린 ‘지그시’라는 제목의 이 시는 어쩌면 시인 자신이 살아온 모습을 노래한 자서전적인 시이며 또 앞으로 어떤 시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시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줄 바꿈 없이 한 문장으로 된 시이지만 내용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수 농사지은 옥수수 몇 개를 따서 그 겹들을 벗기다가 가장 마지막에 옥수수 알들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속 털을 본 것이 한 부분이고, 그 부드러운 속 털을 보고 문득 ‘진안 동향면 지나다’ 본 적이 있었던 왜가리 숲이 생각 난 것이 또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부분은 이 두 상황에서 시인이 공통점을 발견하고 시인만의 특유의 ‘시적 은유’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무게조차도 없이 그저 지그시, 알알이 감싸고 있는 한없이 보드라운’ 옥수수의 속 털과 ‘폭우가 쏟아져도 한 자리에서 지그시, 입과 날개 거두고 지그시’ ‘꼼짝 않고’ 알을 품고 있는 왜가리의 모습이 ‘지그시’라는 사랑의 모습으로 닮았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소중한 것 깊이 품어본 자들은 알죠 왜 한없이 엎드릴 수밖에 없는지, 왜 한사코 여리고 보드라워질 수밖에 없는지, 왜 하염없이 그를 감싸줄 수밖에 없는지, 사랑은 그런 것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저 옥수수 알을 지그시 감싸고 있는 속 털과 진안 동향면 숲에서 보았던 알을 품고 있는 왜가리의 모습을 단순 비교하는 데서 끝났다면 시가 되지 않았겠지만, ‘소중한 것 깊이 품어본 자’가 시인 자신이기도 하면서, 이 시를 읽는 모든 이들이 되도록 그 사랑의 현장으로 초대함으로써 ‘시적 은유’로 멋진 한 편의 시로 완성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게 사랑이다’는 시어를 읽으면 지금도 시인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냥 지그시’ 사랑하는 것, ‘그게 사랑이다’라고.
시인은 시집 이외에도 많은 산문집을 내면서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 속으로 초대하여 주인공으로 등장시킵니다. 들어주는 넉넉한 귀가 있는 시인은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가서 쉼 없이 철썩이며 밀려오는 삶의 파도 소리를 듣고 그들을 위로하고, 가슴에 맺힌 뜨거운 마음으로 연서를 썼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한 편의 시가 되었고 곡조 있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같은 시집에 실려 있는 그녀의 시 한 편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시 안 쓰는 시인들
- 김해자
무의도 섬마을에서 문화교실을 하는데, 갯벌에서 박하지 잡다 오고 산밭에서 도라지 캐다 오고 당산에서 벌초하다 오고 연필 대신 약통 메고 긴 지팡이 짚고 왔습니다
저 고개 너머, 자월도 살던 대님이라고 있어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 모냥 갸름한 게 여자는 여자여
내가 죽으면 어느 누가 우나
산신령 까마구 드시게 울지요
일본 말루다 그렇게 슬픈 노랠 했어
첩으로 살다 아이 하나 낳구는
덕적도로 시집가 죽었어
공중에 펼쳐진 넓디넓은 종이에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까막눈이 시 속으로 대님이가 까악까악 날아왔습니다 이 땅에 시 안 쓰는 시인 참 많습니다 명녀 아지 은심이 숙희 승분이 경애 춘자 상월이 이쁜이, 시보다 더 시 같은 생애 지천입니다
- 시집 <집에 가자>(삶창, 2015)
마음으로 들어 줄 줄 아는 시인에게는 그들의 삶의 소리가 바로 시요, 그 삶을 살아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시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녀에게 2021년 허난설헌 시문학상을 수상하게 했던 시 ‘버버리 곡꾼’에서 시인은 이들 ‘시 안 쓰는 시인들’을 위해 ‘세상에 / 노래하러 왔네 맞으러 왔네 대신 울어주러 왔네’라고 자신을 분명히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주말, 강기원, 김해자, 박일환, 최두석 시인의 최신간 시집을 한꺼번에 받아 들고, 그중 가장 먼저 펼쳐 본 김해자 시인의 시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첫 페이지부터 숨을 헐떡이면서 끝까지 단숨에 읽었습니다. 그리고 며칠간 시인의 시 때문에 가을맞이 열병을 앓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시인이 자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대신 울어주고 대신 노래하며’ 살아가고 있듯이,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시보다 더 시 같은 생애’들을 발견하고 그 삶을 세심하게 들어주면서, ‘그냥 지그시’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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