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노래와 이야기 / 깽깽이풀 - 최두석

석전碩田,제임스 2023. 9. 27. 06:00

노래와 이야기

 

- 최두석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 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 시집 <대꽃>(문학과지성사, 1984)

 

* 감상 : 최두석 시인.

1956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와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80년 <심상>에 시 ‘김통정’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강릉대학교(현, 강릉원주대학교)에 재직(1991~1997)하였고, 1997년 서울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로 자리를 옮겨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지난 2021년 정년퇴직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대꽃>(문학과지성사, 1984), <임진강>(청사, 1986. 개정판; b, 2010), <성애꽃>(문학과지성사, 1990),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문학과지성사, 1997), <꽃에게 길을 묻는다>(문학과 지성사, 2003), <투구꽃>(창비, 2009), <숨살이꽃>(문학과지성사, 2018), <두루미의 잠>(문학과지성사, 2023) 등이 있습니다. 2007년 불교문예작품상, 2010년 오장환문학상, 2023년 조태일문학상, 그리고 다음 달 10월 14일에 수여하는 2023년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지난 6월에 발간된 최두석 시인의 최근 시집 <두루미의 잠>을 읽어 내려가다가 자연 생태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 발품을 팔고 다니는 시인이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처음 낸 시집에 실린 이 시가 시인을 이해하는 데는 적격이겠다는 생각에서 함께 읽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이번 시집에 실린 시 중에서 그의 근황을 알만한 시 한 편도 이 글의 말미에 덤으로 읽어 보려고 합니다.

 

대학에서 ‘시와 리얼리즘’을 가르치면서 오장환 연구자로도 알려진 최두석 시인을 지난 2010년 오장환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하면서 문학상 심사위원들은 그를 ‘자연을 깊이 통찰하여 사람들의 구체적인 경험 현실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상상력이 풍부하며, 이야기가 있는 서정적 화법이 뛰어난 시인’이라고 평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바로 이런 최 시인의 시적 방법론을 잘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시인은 시의 본질을 ‘이야기가 있는 노래’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시가 노래가 되어야 하지만 감정을 너무 과잉으로 표현하다가 오히려 상처가 깊어지기도 하므로 노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네러티브, 즉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시입니다. 시인은 ‘막상 목청을 떼어 내고 남은 가사’ 즉 노래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남아 /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고 말합니다. 그가 시의 서정적인 면을 ‘목청을 떼어 내고 남은 가사’라고 표현한 시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고 지금 시단(詩壇)의 현실을 자성(自省)하면서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 은밀한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고 시인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이 어떠해야 함을 암시하듯 표현하지만,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 덧’난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쉬 덧나는 상처를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고 시인으로서 출사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근사하게 출사표를 던지며 출발했던 시인은 지난 40여 년,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라면서 오롯이 그 한길을 달려왔고, 지금도 그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조태일 문학상을 수상하게 했던 시집 <두루미의 잠>은 우리 국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자연 속에 있는 ‘생명들’을 직접 만나며 그들에게 이야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한 흔적들이 이곳저곳에서 만날 수 있는 시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가 오래전 말했던 것처럼, ‘이야기는 그늘 속에서 곰삭아 / 노래가 되고 / 노래는 아스라이 하늘로 스러지며 / 이야기를 부른다’는 소망이 실현되는 지점이라고나 할까요.

 

어느 노부부를 화자로 등장시켜 슬쩍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시인 자신의 근황을 알려주는 시 한 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깽깽이풀

 

- 최두석

 

남편은 꽃 보러 산으로 가고

아내는 해금 배우러 학원에 다니는

함께와 따로가 분명한

엇갈린 취향의 노부부가 있다

 

손발에 힘이 빠지기 전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보자고

남편은 산에 올라 꽃사진 찍고

아내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농현을 한다

 

그냥 취미에 그치지 않고

남편은 멋진 사진 전시회를 꿈꾸고

아내는 무대에 올라 보란 듯이 연주를 하고 싶은

동상이몽의 염원도 있다

 

깽깽이는 자생지에서 만나기 힘든 꽃

봄바람에 춤을 추는 귀하고 어여쁜 꽃 보며

남편은 끊길 듯 이어지는 해금 소리 듣는다

왜 하필 이름이 깽깽이인가 생각하며

 

그러면서 다시 생각한다

풀꽃과 악기의 이름이 같은 이유에 대하여

잠시 잠깐인 풀꽃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들으면 사라지는 해금 소리에 대하여.

 

- 시집 <두루미의 잠>(문학과 지성사, 2023)

 

퇴직 후 그는 지금도 ‘꽃 보러 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저 가까운 산이 아니라 전국의 산야를 누비고 있고 또 ‘코로나 후유증으로 / 무기력감에 시달리던 봄날 / 부러 찾아가’(‘연령초’ 시 본문 중에서)기도 할 정도로 열정이 넘칩니다. 그리고 ‘그냥 취미에 그치지 않고’ ‘멋진 사진 전시회를 꿈’꿀 정도로 한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마치 완전히 ‘따로’, ‘동상이몽’을 꿈꾸는 부부 같지만, 실상은 해금 소리 만들어 내고, 꽃 사진에 이야기를 덧입히는 ‘창조적인 일’로 열심인 부부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는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느냐’가 중요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시에 이야기를 불어넣는 ‘그 한 길’을 달려온 시인이 참으로 귀합니다.

 

시인이 어느 날 사진 전시회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가장 먼저 달려가 격려하고 또 그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습니다. - 석전(碩田)

깽깽이풀꽃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