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그늘에 묻다 - 길상호

석전碩田,제임스 2023. 9. 6. 13:52

그늘에 묻다​

 - 길상호​

달빛에 슬며시 깨어보니​
귀뚜라미가 장판에 모로 누워 있다​
저만치 따로 버려둔 뒷다리 하나,​
아기 고양이 산문이 운문이는​
처음 저질러놓은 죽음에 코를 대고​
킁킁킁 계절의 비린내를 맡는 중이다​
그늘이 많은 집,​
울기 좋은 그늘을 찾아 들어선 곳에서​
귀뚜라미는 먼지와 뒤엉켜​
더듬이에 남은 후회를 마저 끝냈을까​
날개 현에 미처 꺼내지 못한 울음소리가​
진물처럼 노랗게 배어 나올 때​
고양이들은 죽음이 그새 식상해졌는지​
소리 없이 밥그룻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나는 식은 귀뚜라미를 주워​
하현달 눈꺼풀 사이에 묻어주고는​
그늘로 덧칠해놓은 창을 닫았다​
성급히 들어오려다 창틀에 낀 바람은​
다행히 부러질 관절이 없었다

- <우리의 죄는 야옹>(문학동네, 2016)

* 감상 : 길상호 시인.

1973년 충남 논산 대둔산 자락에서 10남매 중 막둥이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그 노인이 지은 집’이 당선,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2004), <모르는 척>(천년의 시작, 2007), <눈의 심장을 받았네>(실천문학, 2010), <우리의 죄는 야옹>(문학동네, 2016),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걷는 사람, 2019) 등이 있으며, 에세이집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걷는사람, 2020), 사진 에세이집 <한 사람을 건너왔다>(다이얼로그, 2015)가 있습니다.

대시동인상(2004), 이육사문학상 신인상(2006), 천상병시상(2008), 시인협회 젊은 시인상(2011), 질마재 해오름 문학상(2011), 김달진문학상 신인상(2012), 고양행주 문학상(2019), 김종삼시문학상(2020)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학을 졸업한 후 충남 예산에서 학원 강사로 약 2년간 열심히 생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들로부터 인정받았고 학부모들을 상담하면서 점점 그 생활에 매몰되어 갈 무렵, 문득 그의 가슴 한구석에 찬 바람이 부는 것처럼 허전함이 몰려왔습니다. 매일 수업 준비와 수업 등 꽉찬 하루를 보내고 주말에는 동료 선생님들과 등산도 가고 술잔도 기울이며 살던 그가 문득 생각한 건, ‘아, 내가 지금 마음으로부터 시가 멀어지고 있구나’하는 자각이었습니다. 더 이상 시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학원을 그만둬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마침 모교에 새로 생긴 학과인 문예창작학과의 조교를 하면서 국문학과 석사과정 공부를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전에 자신이 조금씩 써왔던 시들이 그저 하나의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길상호 시인’의 시를 찾아 떠나는 여정(旅程)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만 대학원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학문적인 연구와 시작(詩作) 사이의 괴리감이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는 학교 선배와 함께 대전대학교 앞에서 조그마한 식당을 차려 장사를 했습니다. 장사가 안되는 날,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즐겁게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경험 없이 뛰어든 식당 일이 잘되었다면 좋으련만 이내 식당도 접어야 했고, 생활을 위해서 가구공장에서 잠깐, 농기계공장에서 잠깐, 학습지 교사로 잠깐 일을 하기도 하다가, 2006년 대전에서보다는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이재무 시인과의 인연으로 그가 운영하는 <천년의 시작> 출판사에서 2년 반 정도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금은 안양예술고등학교 등 이곳저곳에서 시 창작 수업을 강의하고 있으며, 2008년 세 살짜리 고양이 ‘물어’를 만나 고양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운문’과 ‘산문’을 알게 되었고, 또 양재동 골목길에서 만난 ‘꽁트’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여 모두 네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전업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런 다양한 삶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시단의 평론가들은 길상호 시인을 ‘삶의 어둠과 밝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전통적 서정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단단함이 가능성으로 평가받는 시인’ 또는 ‘사물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치밀한 언어 구사로 시단의 자기 자리를 확실히 다진 시인’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어느 시문학 잡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고양이들과의 온전한 대화를 꿈꾸며 시와 산문, 그림 등으로 ‘고양이 어(語)’를 연습 중입니다”라고 답했던 그의 말이 참으로 시적(詩的)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가을의 전령인 귀뚜라미 한 마리가 시인이 사는 공간으로 들어왔다가 고양이 운문이와 산문이에 의해 주검으로 변했고, 어스름 달빛에 깬 시적 화자가 그 시체를 보면서 창밖으로 던져버린 상황을 시인만의 옹골진 언어로 표현한 시입니다. 시의 한 행 한 행마다 밑줄을 그어야 할만한 멋진 ‘서정적인 표현’들이 가득합니다.

‘귀뚜라미가 장판에 모로 누워 있다’, ‘계절의 비린내를 맡는 중이다’, ‘더듬이에 남은 후회를 마저 끝냈을까’, ‘날개 현에 미처 꺼내지 못한 울음소리가 / 진물처럼 노랗게 배어 나올 때’, ‘하현달 눈꺼풀 사이에 묻어주고는’, ‘그늘로 덧칠해놓은 창을 닫았다’, ‘성급히 들어오려다 창틀에 낀 바람은 / 다행히 부러질 관절이 없었다’ 등이 그러합니다.

인이 사는 공간이 ‘그늘이 많은 집’이라는 전제가 이 시 전체를 통해서 성찰의 계절인 가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 그늘이 많은 곳이 ‘울기 좋은’ 곳이라 생각하여 들어왔다가, 그저 본능적으로 잡아 죽여놓고 보는 고양이(‘운문이와 산문이’)에 의해 주검이 되어 모로 누워버린 귀뚜라미. ‘먼지와 뒤엉켜’ ‘날개 현에 미처 꺼내지 못한 울음소리’를 간직한 채 죽은 귀뚜라미가 어쩌면 그 ‘그늘이 많은 집’에 살고 있는 시인 자신은 아닐까. 

러나 ‘식은 귀뚜라미’지만, 시인은 그늘로 덧칠해놓은 창문을 활짝 열고, 달빛을 비치고 있는 ‘하현달 눈꺼풀 사이에 묻어 주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저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은 간절한 염원이요 희망과 꿈을 담은 행동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성급히 들어오려다 창틀에 낀 바람’은 ‘다행히 부러질 관절이 없’을 뿐 아니라 더 이상 고양이의 공격도 받을 일이 없을 것임을 확인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직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한낮에는 마지막 매미 소리가 간간이 들리긴 하지만, 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 소리가 대세입니다. 가을의 길목에서 길상호 시인의 ‘그늘에 묻다’를 감상하며 후회와 아쉬움이 섞인 삶을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가져볼 일입니다. 그리고 이 가을에는 하현달 눈꺼풀 사이에 묻어 두었던 울음소리를 꺼내서 그늘로 덧칠해놓은 창문을 활짝 열고, 그 틈에 낀 바람을 맘껏 맞으며 힘껏 노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