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다리
- 박일환
내 고향은 충청도
멍청도라 불리기도 하지만
양반의 고향이라는 말도 있지
그래서 내가
양반다리하고 앉는 걸 좋아하는 걸까?
나는 순천 박씨
박혁거세를 먼 조상으로 하고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파에 속한다지만
아무래도 나는
우리 집 족보가 가짜인 것만 같아
비록 양반다리 자세를 좋아하긴 해도
상놈 출신이라고 해야
더 멋지고 당당할 것 같은데
시제(時祭)에 가서 두루마기 입은 어른들 보면
가짜 족보 아니냐는 말은
차마 꺼내기도 어려운 상황
양반다리 슬쩍 풀면서
조선 오백 년이 길었다며 한탄하고
양반다리 대신 책상다리라는 말을 쓰자고 해봤자
민중은 개돼지라는
출세한 자의 말 한마디에 무너지고 마는 형국
그러니 어쩌겠는가
개돼지임을 인정하고 한평생 엎드려 살며
사람이 개돼지보다 나은 게 뭐냐고, 중얼거리기라도 해야지
그렇게 개돼지에게 용서를 빌어야지
내가 용서받기 전까지
용서받지 못할 짓 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말아야지
- 시집 < 귀를 접다>(청색종이, 2023)
* 감상 : 박일환 시인.
1961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7년 서울 장훈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으며 2018년 8월, 명예퇴직하였습니다. 전교조 파동이 있을 때 해직되었다가 복직되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1992년 전태일문학상 단편소설 우수상을 받았으며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에 시가 추천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푸른 삼각뿔>, <끊어진 현>(삶창, 2008), <지는 싸움>(애지, 2006), <덮지 못한 출석부>(나라말, 2017), <등 뒤의 시간>(반걸음, 2019), <귀를 접다>(청색종이, 2023) 등이 있으며, 동시집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창비, 2013), 청소년 시선집 <의자를 신고 달리는>(창비교육, 2015), <학교는 입이 크다>(한티재, 2014), <만렙을 찍을 때까지>(창비, 2019)를 냈습니다. 장편소설 <바다로 간 별들>(우리학교, 2017)이 있습니다. 중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용악> (실천문학사, 2004), <진달래꽃에 갇힌 김소월 구하기>(한티재, 2018), <청소년을 위한 시 쓰기 공부>(지노, 2018) 등의 책을 냈습니다.
특히, 우리말과 우리 글에 대한 관심이 커서 <국어 선생님, 잠든 우리말을 깨우다>(작은숲, 2012), <국어선생님, 잠든 사투리를 깨우다>(작은숲, 2016), <미주알 고주알 우리말 속담>(한울, 2011), <미친 국어사전>(뿌리와 이파리, 2015), <국어사전 혼내는 책>(유유, 2019), <국어사전에서 캐낸 술 이야기>(달아실, 2020), <맹랑한 국어사전 탐방기>(뿌리와 이파리, 2020), <국어사전 독립선언 – 일본어사전을 베낀 국어사전 바로잡기>(섬앤섬, 2022), <국어사전이 품지 못한 말들>(달아실, 2021)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이 밖에도 교육산문집 <나는 바보 선생입니다>(우리학교, 2015), <문학 시간에 영화 보기 – 한국 영화로 만나는 시와 시인들>(한티재, 2022) 등 재직 중 1년에 한 권 꼴로 여러 권의 책을 냈으며, 퇴직 후에도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올해 6월에 출간된 박일환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인 <귀를 접다>에 실린 시입니다. ‘충청도 출신 신라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순천 박씨 양반 가문’이라는 변할 수 없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소개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양반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족보가 가짜인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오히려 ‘민중은 개돼지’라고 말하는 출세한 자에게 당당하게 맞서지도 못하는 자신의 비루(鄙陋)함을 스스로 질타하고 있는 ‘자성의 시’ 같기도 합니다. ‘개돼지임을 인정하고 한평생 엎드려 살며 / 사람이 개돼지보다 나은 게 뭐냐고, 중얼거리기라도 해야’ 되는 데 그것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양반이 아니라 ‘상놈 출신이라고 해야 / 더 멋지고 당당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고 시인은 일갈(一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그동안 30여 년 교단에 있으면서 관심을 가졌던 우리말과 우리 글에 대한 애정도 시의 소재로 슬쩍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양반다리 대신 책상다리라는 말을 쓰자’는 것이 그것인데, 그러나 이마저도 시인 스스로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권세 잡은 자의 한마디에 ‘무너지고 마는 형국’이니 ‘개돼지보다 나은 게 뭐냐고, 중얼’거릴 뿐이라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다짐함으로써, 지금까지 읊었던 모든 내용을 일시에 반전시킵니다. ‘내가 용서받기 전까지 / 용서받지 못할 짓 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말아야지’라고. 개돼지가 시인을 용서할 일이 없으니, 용서받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의 다짐은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출세한 자의 말 한마디에 무너지’지 않겠다는 강한 역설적인 ‘시적 은유’의 표현입니다.
‘순천 박씨, 박혁거세를 시조(始祖)로 하는 박팽년파’라는 시어를 읽으면서, 지난 1년간 재능 기부 차원에서 일했던 ‘배씨대종회’ 종보(宗報) 편집일이 새삼스럽게 생각이 났습니다. 일주일에 이틀만 일하기로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저 스스로 지난 6월 1일 자 종보 발행을 마지막으로 그 일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종보 편집을 책임지면서 그동안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분야인 씨족과 족보, 문중과 종친회가 운영되는 방식 등에 대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던 귀중한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성씨(姓氏)마다 저마다 주장하는 화려한 집안의 내력,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족보들이 있지만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그 족보들이 사실상 90% 이상은 모두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시인도 이런 사실을 알기에, 해마다 시제(時祭)에는 꼬박꼬박 참석하지만, 두루마기 입고 근엄하게 예식을 치르는 어른들을 보면 ‘차마 꺼내기도 어려운’ ‘가짜 족보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고 하니 공감이 100% 가는 유머스런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같은 시집에 수록되어있는 시 한 편을 더 읽어 보겠습니다. 이 시도 시인의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시입니다.
시를 위한 진화론
- 박일환
시를 쓰면 자기 집 강아지에게 먼저 읊어주던 시인이 있었다 그러면 강아지는 귀를 쫑긋 세우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시인은 시를 알아듣는 강아지라며 목덜미를 쓸어주었으나 다른 집 개들은 시인을 보면 왈왈 짖을 뿐이었다
강아지가 늙어 숨을 거두던 날 시인은 조시를 썼으나 더 이상 시를 들어줄 강아지도 늙은 개도 없었다 그렇다고 왈왈 짖어대기만 하는 옆집 개를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개 무덤 앞에 가서 조시를 읊어준 다음 슬피 울었다
다른 강아지를 분양받아 열심히 시를 읊어주던 시인이 시집을 냈더니 대박을 쳤다 시인의 사연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소문을 들은 다른 시인이 고양이에게 시를 읊어주기 시작했다 좋은 시는 강아지와 고양이도 감동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시론을 쓴 평론가는 올해의 평론가상을 받았다
시를 알아듣는 강아지와 고양이는 광고에도 나오기 시작했고, 시가 인간만을 위하는 협소한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범생명파 시인들은 그게 시가 진화하는 방향이라고 했다 AI가 시를 쓰는 시대에 맞서기 위한 전략이라고도 했다 아무려나 시가 죽지는 않을 모양인데, 시는 진작에 죽었다며 슬퍼하던 친구에게 어떤 말로 위로를 보내야 하나?
- 시집 < 귀를 접다>(청색종이, 2023)
시를 쓰는 시인에게 시의 효용가치가 무엇이냐고 아마도 친구 중에 누군가가 폄하를 했든가 아니면 시를 쓰는 자신에게 스스로 이런 자조 섞인 절망감이 들기도 할 때,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지만 이렇게라도 시를 쓰는 ‘시인’으로, 꿋꿋이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하는 시입니다. ‘시는 진작에 죽었다며 슬퍼하던 친구에게 어떤 말로 위로를 보내야 하나?’는 마지막 문장이 서사가 있는 긴 내용을 일시에 반전시켜 버리는 묘미가 있어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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