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야 단풍다운 가을 단풍
- 장경린
중국집에 잡혀 먹은 손목시계처럼
최신판 영한사전처럼
맛이 진한 몽고간장처럼 미군 야전잠바처럼
돼지 껍데기처럼
요즘도 헌책방에서 제법 거래가 되는 '思想界'처럼
조계사 대웅전
문지방 위
꼬리를 떨며 교미 중인 고추잠자리처럼
1리터에 1,450원에서
1,390원으로 다시 1, 530원으로
미친 듯이 널뛰는
휘발유처럼
단풍이여
오늘만큼은 잠시 세상 접어두고
분배냐 성장이냐 누가 뭐래도
북핵 위기니 인구 감소니 독도니 뭐니 다 잊고
단풍이여 그냥 좀더 붉게 타야 쓰겠다
가을 단풍이여
아파트 값이 폭등했지만
더 오를지 몰라
이사도 못 가고 있는 나처럼
자식 과외비 마련하러 노래방 도우미로 나갔다가
뽕짝에 푹 빠진 아줌마처럼
뻔질나게 날아오는 스팸 메일처럼
가을 단풍이여
이제는 붉게 타다 가는 수밖에 없는
그거밖에 할 게 없는
그래야 단풍다운 가을 단풍이여
- 시집 <토종닭 연구소>(문학과지성사, 2005)
* 감상 : 장경린 시인.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85년 <문예중앙>에 ‘허리 운동’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1990년에는 <현대 시 세계>에서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은행에 재직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이었습니다. 그 후 은행을 그만두고 대학의 무용과에 출강하며 시와 희곡을 쓰고 연출도 하면서 故 김영태 시인(1936~2007)과 깊은 문학적 교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서 ‘넋이야 있고 없고’가 당선되었습니다.
시집으로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민음사, 1989),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문학과지성사, 1993), <토종닭연구소>(문학과지성사, 2005),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민음사, 2007 개정판), 육필 시집 <간접 프리킥>(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등이 있으며, 우리 시대 작가 25인과의 가상 인터뷰로 꾸민 <문학의 전설과 마주하다>(중앙북스, 2010, 共著)가 있습니다. <시와 시학>의 젊은 시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단풍 든 나무들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물들기 시작한 ‘단풍 친구’들에게 여러 해 가을을 먼저 경험해 본 시인이 한 수 가르쳐 주는 선배처럼 다정한 조언을 건네는 듯한 시가 오늘 감상하는 시입니다. ‘중국집에 잡혀 먹은 손목시계나 최신판 영한사전’ ‘미군 야전잠바’ ‘돼지 껍데기’ 같은 시어들은 힘겹게 사는 우리 인생의 현실을 ‘직유법’으로 나열한 표현들입니다. 그런 힘든 상황이지만 아랑곳 없이 ‘조계사 대웅전 / 문지방 위 / 꼬리를 떨며 교미 중인 고추잠자리’ 신세와 다름없음을 씁쓸하게 그려낸 시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단풍에게 할 수 있는 말이 확실하게 하나 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입니다. 그것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단풍이 할 일은 그저 ‘이제는 붉게 타다 가는 수밖에 없는 / 그거밖에 할 게 없는 / 그래야 단풍다운 가을 단풍이여’라는 말입니다. 약간은 염세적인 태도로 말하는 표현들이 솔직한 삶의 무늬들이 묻어나는 시어들이어서 정겹습니다.
시인은 한국은행 국고과에서 근무했고, 직장을 그만둔 후에는 경제 자문 연구소를 운영했을 정도로 경제와 관련한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탓인지 시의 중반부는 마치 일간신문의 경제면을 읽는 듯합니다. ‘휘발유 값’이나 ‘분배냐 성장이냐’ ‘아파트값 폭등’ ‘자식 과외비’ 등, 먹고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경제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20년 전 상황을 노래했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팍팍한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신기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시인은 목청을 높입니다, ‘단풍이여 그냥 좀더 붉게 타야 쓰겠다 / 가을 단풍이여’ 라고.
2007년 암 투병 끝에 타계한 故 김영태 시인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무용 평론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전방위 예술가’였습니다. 그 김영태 시인이 생전에 장경린 시인에 대해서 “독신, 직장에서 경상도 산골로 좌천, 그러나 ‘있고 없고’에서 보듯 여전히 할말은 하고 있다. 규정과 판례를 따지는 직장에서 그가 항문으로 비약해 버린 곡예도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든다.”라고 그의 시 '있고 없고'를 읽고 난 후 감상문을 쓰면서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이가 나지만 ‘형님 동생’하면서 절친으로 지낼 수 있었으니 어쩌면 ‘결이 비슷한’ 시인이라고나 할까요. 그가 문학 동지였던 故 김영태 시인을 노래한 시 한 편을 더 감상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開花-김영태 시인에게
- 장경린
아들 목우(木雨) 결혼식에서
형님이 입은 가다마이는
소매가 삶은 호박잎처럼 흐늘흐늘했지요
삐딱하게 서서,
마땅히 둘 곳 없는 시선을
가봉하듯 늘어뜨리고
저는 속이 가벼워서
결혼이라는 걸 못해봤어요
블라우스 자락에 클립으로 집어놓은 메모 쪽지처럼
건들건들 사연들을 달고 있다 보면
어느 날 블라우스는 온데간데없고
허공에
홀로 꽂혀 있는 클립
철(鐵)꽃 같아요
사람 하나 간신히 비집고 올라갈 수 있는
중국집 개화(開花)의 목조 계단은
옛날보다 더 삐걱거려요
자장면 면발은 눈에 띄게 가늘어졌죠.
불황 탓이거니 여기고
싱싱한 양파나 한 접시 더 시켜 먹으면
그게 그겁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중국집 ‘개화’의 목조 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시입니다.
고(故) 김영태 시인을 강화도 전등사에 있는 오규원 시인의 옆자리 나무에 수목장해 준 사람이 장경린 시인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쯤 그들이 나란히 누워있는 나무에도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이번 가을만큼은 '잠시 세상 접어두고' '누가 뭐래도' '다 잊고' '그냥 좀더 붉게 타야 쓰겠다 / 단풍이여' 노래하며 담담하게 가을을 보내야겠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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