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가을, 계면조 무게 - 김현에게 - 김영태

석전碩田,제임스 2023. 10. 18. 06:00

가을, 계면조 무게 – 김현에게

- 김영태

[객석]지 10월호에
우리 나라에서 散文을 제일 잘 쓰는
어떤 평론가의 푹 늙은
얼굴을 본다
살오른 피부 듬성 수염
술꾼답던 지난날 총총하던 눈빛도
많이 간 것 같아 보이고
새치가 섞인 푸석푸석한 머리
손질 안 한 그의
꾸밈새는 그대로지만
눈이 부신 듯 세상을 계면조로 가늘게
잘게 그가 사물을 分析하며
아름다운 筆致로 뽐내던
한데 사진기 앞에서는 좀 떨떠름한
모차르트가 調和라면 바하는 평화라고
말하는 그의 人字 두 개
엎은 듯한 입가의 미소가
그나 나나
늙어가고 있는 지금
가을 무게를 저울에 달아보기는

- 시집 <가을, 계면조 무게>(미래사, 1991) 

* 감상 : 김영태 시인. 아호는 초개(草芥). 무용평론가, 음악평론가, 연극평론가. 화가.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매동초와 경복중고등학교,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습니다. 1959년 <사상계>에 ‘시련의 사과나무’ ‘설경’ ‘꽃씨를 받아둔다’가 추천되어 등단하였습니다. 당시 <사상계>에는 박남수 시인이 상임 편집위원으로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 동지로 만나 서로 알고 지냈고 또 <평균율> 동인이었던 마종기, 황동규 시인과는 막역한 문학 동창들이었습니다. 

 시집 <유태인이 사는 마을의 겨울>(중앙문화사, 1965) 이후, <바람이 센 날의 印象(인상)>(현대시학사, 1970), <草芥手帖(초개수첩)>(현대문학사, 1975), <客草(객초)>(1978), <여울목 비오리>(1981), <결혼식과 장례식>(문학과 지성사, 1986), <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민음사, 1988), <매혹>(청하, 1989), <가을, 계면조 무게>(미래사, 1991), <고래는 명상가>(민음사, 1993), <남몰래 흐르는 눈물>(문학과지성사, 1995), <그늘 반근>(문학과지성사, 2000), <누군가 다녀갔듯이>(문학과지성사, 2005) 등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北 호텔>(민음사, 1979), <어름사니의 步行(보행)>(지식산업사, 1984), 소묘집 <잠시 머물렀던 환영들>(열화당, 1980), <섬 사이에 섬>(한국시인협회상 수상 및 소묘집, 현암사, 1982), <왕래>(디자인사, 1989), 시평집 <변주와 상상력>(고려원, 1984), 무용 평론집 <저녁의 코페리아>, <연두색 신의 가구들> 등이 있습니다. 

대문학상(1972), 시인협회상(1982), 서울문화예술평론상(서울신문사, 1989), 허행초상(무용평론상, 2004), 댄스 하트 어워드(현대무용진흥회)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시인으로서의 활동 이외에 소묘집을 그려내는 화가로, 월간 <객석>의 무용자문위원으로서 음악과 연극을 평론했고, 또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무용원 강사로, 또 수많은 무용 평론을 쓰는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무용평론가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영태 시인이 무용평론가로서는 거의 ‘독보적’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는 <金榮泰 舞踊手帖(김영태 무용수첩)>이란 이름으로 무용 평론집을 무려 열 권을 냈고, 당시만 해도 그의 얼굴이 안 보이는 무용공연은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가 쓴 무용 대본도 ‘덫’, ‘결혼식과 장례식’ 등 80여 편이나 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그 자신이 스스로를 예술의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넘나드는 ‘문화의 불침번’이라고 자처했던 것처럼,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을 불살랐던 사람입니다. 그의 詩를 들여다보면 시인이 관심을 가졌던 예술 세계가 곳곳에 녹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는 말로 된 그림’이라는 그만의 시론을 충실하게 실천하기 위하여 영감과 상상력, 혹은 언어를 전개하는 방법론이 그림을 그리듯 ‘회화적’이라고나 할까요.

업을 위해서 김영태 시인은 1968년 <월간중앙> 기자로 입사했지만 곧 퇴사하였고 한국외환은행으로 옮겨 1992년 퇴사할 때까지 은행 조사부에서 은행 잡지, 단행본, 각종 통계자료 등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가 김영태 시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1999년 정월, 홍익대학교 교정에서였습니다. “졸업 후 거의 모교에는 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오고 싶어서 왔다”면서 홍대 캠퍼스를 찾은 김영태 시인을 만나 꽤 오랜 시간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이런저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들을 했지만, 당시 교수 인사업무를 하던 때라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후배는 그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 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저 ‘이해하는 척’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시인이 했던 많은 이야기 중 그 당시 제게는 아주 생소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발레’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당시 저는 발레할 때 신는 버선이 ‘토슈즈‘라는 사실도 모르는 문외한이었으니 김 시인은 후배와의 대화가 그리 신명 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타계 소식을 들었고(2007) 어렴풋이 그가 왜 그때 오랜만에 모교 교정을 불쑥 찾아왔는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김영태 시인과는 나이 차이가 좀 나지만 당시 평론으로, 그리고 문학으로 서로 가깝게 교류했던 경복고 후배 김현(1942~1990) 교수의 갑작스러운 부음 소식을 듣고(1990년 6월 27일) 그의 생전에 그에 대해 썼던 시를 이듬해에 발간된 자신의 시집 가장 뒤에 실었던 시입니다. 그리고 시집의 제목을 아예 이 시의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최근 마종기 시인을 비롯, 장경린 시인 등을 소개하면서 김영태 시인의 흔적이 자꾸 언급되어 당시 직접 선물 받았던 김영태 시인의 이 시집을 책장에서 꺼내 다시 읽게 되었고, 이맘때쯤 읽기에 안성맞춤인 이 시를 골라본 것입니다.

 시를 썼을 때가 시인의 나이 쉰다섯, 인생의 황혼기라고 하면 조금 이른 나이였겠지만, 시인은 낙엽이 뒹구는 가을을 맞으면서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최고의 지성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평론가 김현 교수를 새삼 다시 바라보았던 듯합니다. 어느 날 문득 잡지에 실린 그의 사진을 보면서 ‘지난날 총총하던 눈빛도 / 많이 간 것 같아 보이고 / 새치가 섞인 푸석푸석한 머리 / 손질 안 한 그의 / 꾸밈새는 그대로지만’ ‘그나 나나 / 늙어가고 있는 지금 / 가을 무게를 저울에 달아보기는’ 하는데 그 무게가 ‘계면조 무게’라는 것입니다.

‘계면조(界面調)’는 한국 음악에 쓰이는 가락의 하나로 서양 음악에서 사용하는 단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정악과 판소리의 ‘계면 가락’은 대개 느낌은 부드러우면서 우울하고 슬픈 한(恨)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데, 판소리 춘향가의 이별가, 옥중가, 옥중상봉 등에, 심청가의 심청모 출상하는 대목, 흥보가의 가난타령, 박타령 등이 계면 가락입니다. ‘아름다운 筆致(필치)를 뽐내던’ 젊은 시절은 다 가고 이제는 ‘그나 나나 / 늙어가고 있는 지금’ 느껴지는 가을의 무게는 달아보나 마나 ‘계면조 무게(가락)’라고 읊은 시인의 노래가 우울하고 쓸쓸함을 더합니다. 두 사람 모두, 뜨겁게 문학에 정진하다가 아쉬운 나이에 서둘러 떠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2017년 6월,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영인문학관에서는 의미가 있는 전시 하나가 마련되었습니다. <짧은 글, 깊은 사연 – 문인 편지전>이 그것이었습니다. 이 전시회에 마침 故 김영태 시인의 10주기를 맞아 그를 회고하는 전시 코너도 마련되었습니다. 시인이 생전에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하여, 그의 캐리컷처들, 그리고 미국에 있는 마종기 시인과 평생 주고받은 160여 통의 편지글들이 전시되었습니다. 그가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면서,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꼼꼼하게 정리하며 모든 자료를 영인문학관 관장에게 보내면서 쓴 그의 편지글 첫 문장입니다. “칠순 역을 지나면서 제가 했던 일을 정리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스터, 프로그램, 기타 모든 자료를 보냅니다. 영인문학관에서 잘 보관하셨다가 언젠가는 날 잡아 전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평생을 기관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그것을 글로 남기는 일을 해서인지, 자신에 대한 자료도 엄청나게 꼼꼼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시인이었습니다.

스로를 <춤 구경꾼>이라고 비하했던 초개(草芥 ; 지푸라기처럼 한갓 먼지, 티끌에 지나지 않다는 뜻) 김영태 시인은 ‘문예회관 대극장 가열 123번’이란 제목의 시에서 평생 변하지 않았던 그의 일상을 이렇게 소소하게 노래했습니다.

문예회관 대극장 가열 123번

- 김영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저는 춤 보러 가서
극장 맨 왼쪽 통로에 있는 자리…
가열 123번에 앉아 있습니다
춤 공연이 있는 날
그 자리가 비어 있으면
누구든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춤 보러 오는 늙은이가 결근했나보다고
보통 저녁나절
저를 만나시려면 그 자리에 오시면 됩니다
30년 넘게 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요
보는 것도 業이지요
제가 보이지 않는 날
나의 누이들 중 누구 하나가
꽃다발을 그 자리에
놓고 가는 게 보이는군요
말없이 그가
세상 뜬 저녁에

– 시집 <그늘 반 근>(문학과지성, 2000)
 
학로 문예회관 대극장(현재 아르코·대학로 예술극장) 가열 123번은 그 후 극장 측 배려로 故 김영태 시인의 ‘지정석’이 되었습니다. 그가 시에서 예측했던 대로 ‘말없이 그가 / 세상 뜬’ 후 한때 그 자리는 ‘누구라도 그대가 된’ 그의 누이 중 하나가 놓고 간 시들지 않은 꽃다발이 늘 놓여있었다고 합니다.

야흐로 가을입니다. 릴케가 ‘신이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고 가을을 노래했듯이, 또 안도현 시인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노래했듯이, 가을은 어쩌면 참으로 뜨겁게 그 계절을 건너온 사람만이 제대로 맞을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열하게 살았지만 젊은 나이에 훌쩍 이승을 떠나버린 평론가 김현,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을 불태웠지만 아쉬운 나이에 서둘러 떠나버린 김영태 시인. 그들이 서로를 향해서 헛헛하게 읊었던 노래가 이 가을의 초입에 읽으니 쓸쓸함이 더합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조화와 바하의 평화, 또 30여 년을 하루 같이 ‘늘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 잔잔하게 일상을 지켜냈던 시인의 삶이, 이 가을 묵직한 무게로 다가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