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학림다방에서 / 미투(美鬪) - 임보

석전碩田,제임스 2023. 10. 25. 06:00

학림다방에서

- 임보

대학병원에 들렀다가
모처럼 대학로를 어정거리고 있는데
낯익은 이름 <학림다방>이 보이기에
들어가 보았네

목조 마루에 목조 탁자
옛 배우들의 사진이 죽 걸려 있고
턴테이블에선 LP 음반이 돌며
'목련꽃 그늘 아래서'를 흘리고 있네

창밖을 내다보니
도서관이 있던 옛 캠퍼스 자리에는
낯선 상전(商殿)들만 점령군들처럼
위풍당당 들어서 있고

50여 년 전
세느* 개천가에서 놀던 그 시절이
아슴아슴 다가오려 하는데
옆 테이블의 세 여자가 떠드는 소리
자꾸만 내 기억을 가로막고 있네

검정색 작업복에 워커를 신고
쌍 과부집에서 김치 깍두기에 막걸리를 마시며
기고만장했던 그 친구들,
스크럼을 짜고 거리를 누비며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했던 4.19의 주역들
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

튀는 놈은 국회의원도 되고
소심한 놈은 교수도 되고
아니, 건달도 되고 놈팽이도 되고
그렇게 저렇게들 지내다가
성급한 놈은 서둘러 이미 떠나가고
이젠 다 늙다리들이 되어
병원이나 드나들고 있는 신세로세

* 세느 : 학교 앞에 흐르던 작은 개울을 우리는 '세느'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 밑에 묻히고 말았다.

- 시집 <사람이 없다>(시학, 2018)

* 감상 : 임보 시인. 본명은 강홍기.

1940년 6월(음력 1939년 5월 13일생) 전남 순천읍 인제리(麟蹄里)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62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였습니다. 1988년 성균관대학교에서 ‘한국 현대시 운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충북대 국문학과 교수로 15년 재직하다가 지난 2005년 퇴임하였습니다. 

1974년 첫 시집 <임보의 시들 59 - 74> 이후, <산방동동(山房動動)>(한국문학사, 1984), <목마일기>(동천사, 1987), <은수달 사냥>(문학세계사, 1988), <황소의 뿔>(신원문화사, 1990), <날아가는 은빛 연못>(시와시학사, 1994), <겨울 하늘소의 춤>(작가정신, 1997), <구름 위의 다락마을>(우이동사람들, 1998), <운주천불>(우이동사람들, 2000),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영언문화사, 2002), <자연학교>(고요아침, 2004), <장닭 설법>(시학, 2007), <가시연꽃>(시학, 2008), <눈부신 귀향>(시학, 2011), <아내의 전성시대>(시학, 2012), <자운영꽃밭>(시학, 2013), <검은등뻐꾸기의 울음>(시학, 2014), <광화문 비각 앞에서 사람 기다리기>(시학, 2015), <산상문답(山上問答)-임보의 잠언 시집>(시학, 2016), <벽오동 심은 까닭>(시학, 2017), <지상의 하루>(움, 2017), <사람이 없다>(시학, 2018), <수수꽃다리-4단 시집>(움, 2019), <청산무>(움, 2020) 등 23권의 시집과 동인지, 시론 집 등을 펴냈습니다. 한국현대시협상, 성균문학대상, 시예술상본상, 상화 시인상, 윤동주 문학상(2014), 녹색 문학상(2017)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랑스 상징주의 천재 시인 랭보(J. A. Rimbaud, 1854~1891)에 심취하여 그의 이름에서 따온 ‘임보(林步)’는 필명이며, 본명은 강홍기(姜洪基)입니다. 인수봉이 보이는 쌍문동 422-127번지 운수재(韻壽齋 ; 그의 집)에서 오래 살면서, 그 주변의 시인들과 <우이동 동인> 활동을 해 온 것이 그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시인 이생진, 홍해리, 채희문, 임보(강홍기)로 구성된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동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임보’ 시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지난 2009년 문정희 여류 시인의 시, ‘치마’에 대해서 답가 형식으로 쓴 그의 시 ‘팬티 – 문정희의 치마를 읽다가’라는 시로 인해 인구에 회자(膾炙)된 사건일 것입니다. 1947년 전남 보성 출신 문정희 시인과 1940년 전남 순천(곡성) 출신 임보 시인 간의 걸쭉한 남도 입담이 담긴 이 두 편의 시는 당시, 또 다른 중재 형식의 시들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세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야한 듯하면서도 예술적인 시라고 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인간의 본성에 화답하는 듯 거침없는 시인들의 재치가 번뜩이는, 주고받는 시는 예술과 문학 세계의 풍류를 만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서울 대학로에 있는 ‘학림다방’과 연관된 추억을 소재로 삼아 ‘이젠 다 늙다리들이 되어 / 병원이나 드나들고 있는 신세로세’라고 팔십 인생을 살아온 노(老)시인이 회한에 젖어 노래한 시입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대학로 서울대 문리과대학 건너편에 있던 <학림다방>은 1956년 개업하였으며 비록 처음 개업했을 당시의 그 건물은 아니지만(1983년에 그 자리에 있던 노후 된 건물은 철거 후 신축되었음) 신축 후 같은 이름과 고풍스러웠던 같은 인테리어를 유지하며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으니 67년째 이어오고 있는, 대학로에서는 가장 오래된 가게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지 서울대학생들의 휴식처이자 아지트였으며, ‘서울대 문리대 제 25강의실’이라는 별칭이 주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금도 학림다방은 꽤 인기 있는 장소로 사람들이 찾고 있는데, 그 이유는 <별에서 온 그대>, <응답하라 1988>, <지붕 뚫고 하이킥> 등의 드라마 촬영 장소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별에서 온 그대>에서 도민준이 자주 갔던 단골 가게이기도 하며, <응답하라 1988>을 통해서 쌍문동과 더불어 이곳이 알려지면서 옛 추억을 느끼려는 중노년층과 옛날 분위기에 관심이 있는 젊은 층들이 찾기 시작하면서 최근에는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할 정도로 상당히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마도 어느 날 서울 대학병원을 다녀오던 시인의 눈에 옛 추억을 새록새록 나게 하는 ‘학림다방’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나 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들어가서 옛 추억을 되살리는 자리에 앉아 지나간 50년을 꿈꾸듯이 생각하며 상념에 빠졌습니다.

‘검정색 작업복에 워커를 신고 / 쌍 과부집에서 김치 깍두기에 막걸리를 마시며 / 기고만장했던 그 친구들, / 스크럼을 짜고 거리를 누비며 /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했던 4.19의 주역들 / 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 

싱한 에너지로 대학로 거리를 누볐던 그 옛날의 주인공들은 어디로 갔나 자문하고, 그다음 연에서 대답하는 형식으로 시는 전개됩니다. 그리고 시인의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집니다. 늦은 나이에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치고, 본인의 표현대로 ‘운 좋게’ 오십이 넘은 나이에 대학의 ‘교수’ 자리를 하나 꿰찼던 자신을 생각하면서, ‘소심한 놈’이라고 표현한 것도 재미있습니다. ‘튀는 놈은 국회의원도 되고../ 건달도 되고 놈팽이도’ 되기도 했지만 ‘그날의 주역들’ 모두가 ‘이젠 다 늙다리들이 되어 / 병원이나 드나들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고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이 쓸쓸하게 전해져 옵니다.

이가 드는 것을 나이대별 ‘평준화’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나이 마흔이면 지식의 평준화라고 합니다.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석사인지, 박사인지, 또 해외파인지 국내파인지 별 상관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오십 대가 되면 미모나 인물 평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스 코리아 출신인지 키가 크든 작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비교해 본들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라는 이야기입니다. 육십 대가 되면 성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또 정력이 세든 약하든 그것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칠십 대가 되면 물질의 평준화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매일 매일 쓰는 돈은 정해져 있으며 아무리 돈 자랑을 해 봤자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든이 되면 건강의 평준화입니다. 시인이 노래했듯이, ‘다 늙다리들이 되어 / 병원이나 드나들고 있는 신세’가 되어 모두 다 약봉지 잔뜩 끼고 사는 처지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흔이 되면 ‘생의 평준화’입니다. 

난 2018년, 전 세계적으로 소위 ‘미투 운동’이 일어났을 때, 임보 시인이 자신의 공식 카페에 발표한 ‘미투(美鬪)’라는 제목의 시 때문에 논란의 한가운데 선 일도 있었습니다.

미투(美鬪)

- 임보

진달래가 벌에게 당했다고 하니
민들레도 나비에게 당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매화 산수유 복숭아 살구 자두들이
떼를 지어 ‘나두! 나두! 나두!’
아우성을 쳤다

드디어
벌과 나비들이 얼굴을 싸쥐고
은둔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해
과일나무들은 열매를 못 달고
세상은 깊은 흉년에 빠졌다

- 다음 카페 <자연과 시의 이웃들> 詩/ 신작詩(2018.3.21.)

인은 거꾸로 나이를 드는지, 정년 퇴임을 한 후에 낸 시집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활발한 시작 활동으로 왕성한 필력을 자랑할 뿐 아니라 시를 통해서, 자발적으로 삶 속에서 논란이 되는 뜨거운 이슈 한가운데로 선뜻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이 듦의 평준화 이론’은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천편일률적인 공식은 아닌 듯합니다. 앞으로도 임보 시인의 정진을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