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멀리서 빈다 /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석전碩田,제임스 2023. 11. 1. 06:03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시집 <멀리서 빈다>(시인생각, 2013)
- 시선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지혜, 2020)
- 필사 시집 <끝까지 남겨두는 그 마음>(북로그컴퍼니, 2021)

* 감상 : 나태주 시인.

1945년 3월 17일, 충남 서천군 시초면 초현리 111번지 그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공주사범학교와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1964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오랫동안 재직했습니다. 2007년 공주 장기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43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친 뒤, 공주문화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공주 풀꽃문학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71년 <서울신문(현, 대한매일> 신춘문예에서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등단 이후 끊임없는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수천 편에 이르는 시 작품을 발표해 왔으며, 쉽고 간결한 시어로 소박하고 따뜻한 자연의 감성을 담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그의 시 ‘풀꽃’이 선정될 만큼 사랑받는 대표적인 국민 시인입니다.

의 문학상(1979), 충남 문화상(1988), 현대불교 문학상(1997), 박용래 문학상(2000), 시와시학상(2002), 향토 문학상(2004), 편운문학상(2004), 황조근정훈장(2007, 정년퇴임), 한국시인협회상(2009), 자랑스러운 충남인상(2013), 정지용문학상(2014), 공초문학상(2016), 유심작품상(2017), 김삿갓 문학상(2017), 소월시문학상(2019)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시집 <대숲 아래서>(예문관, 1973) 이후, 올해 출간된 시선집 <처음 사는 인생, 누구나 서툴지>(북로그컴퍼니, 2023), 그리고 50번째 시집 <좋은 날 하자>(샘터, 2023)까지 무려 일백 오십여 권이 넘는 시(선)집, 산문집, 시화집, 동화집 등을 출간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인기 시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재는 주로 집에서 글을 쓰고 초청해 주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문학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사는 삶이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말하며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나눔’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학생들을 만나는 곳이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든지,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인은 이런 재미있는 농담도 하곤 합니다. “차가 없으니 나를 태워주오. 그래서 나태주라고”. 또 그는 청소년기 때의 꿈은 첫째가 시인이 되는 것, 둘째가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사는 것, 셋째가 공주에서 사는 것이었는데 오늘에 이르러 그 꿈을 모두 이루었다고 행복하게 말합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시라 특별한 해설이나 풀이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요즘 같은 가을이 한창일 때 읽기에 적합한 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이곳저곳이 아파오는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면서 멀리 있는 ‘그대’에게 ‘부디 아프지 말라’고 당부하는 시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합니다.

금으로부터 17년 전, 나태주 시인은 큰 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었습니다. 큰 고비를 넘기고 퇴원하면서 시인은 도움을 주었던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며 ‘부디 아프지 마라’는 이 시를 썼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때가 바로 가을이었다고 합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했던가요. 큰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시인이 말하는 ‘부디 아프지 마라’는 한마디 말이 더욱 힘이 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시는 첫째 연과 둘째 연의 이미지를 대조적으로 꾸미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꽃처럼 웃고 있는’, ‘눈부신 아침이 되고’ 등 아직도 영롱한 모습으로 그리움의 대상을 그려낸 것이 1연이라면, 2연은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고요한 저녁이 온다’ 등 그 그리운 사람을 못내 잊지 못해서 애태우는 시적 화자(話者)의 애틋한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시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의 마지막 한 문장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라는 말은, 누군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에게든지 해당하는 간절한 기도가 되는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늘은 11월의 첫날입니다. 시인이 ‘제일로 좋아하는 달’이 바로 ‘십일월’입니다. 또 시인이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 ‘가을’이라고 하니, 꼭 오늘 읽으면 좋은 시 한 편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십일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십일월에서 십이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깨금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時祭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송封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 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동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 굴품한 : ‘배가 고픈 듯한, 시장기가 드는 듯한’의 충청도 방언.

- 시집 <슬픔에 손목 잡혀>(시와시학, 2000)
- 시선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지혜, 2020)

인이 가을을 사랑하는 이유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유년 시절 이맘때쯤 고향 마을에서 겪었던 추억들이 수채화처럼 스쳐 지나가며 공감할 수 있습니다. 시제(時祭)가 끝난 후, 차려진 음식을 나눠 집으로 갖고 가는 봉송 꾸러미에 대한 추억, 그리고 아버지가 들고 오는 그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어린 형제들의 모습이 마치 유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너무도 정겹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는 시인의 당부는 어쩌면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았던 사람의 절절한 애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가을을 맞는 모든 이들에게, 이제는 소중한 것,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더 쏟으라고 멀리서 외치는 사랑의 속삭임 같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