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바닷가 늙은 집 / 문전성시 - 손세실리아

석전碩田,제임스 2023. 11. 15. 06:44

바닷가 늙은 집

- 손세실리아

제주 해안가를 걷다가
버려진 집을 발견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그 어떤 이끌림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던 것인데요 둘러보니
폐가처럼 보이던 외관과는 달리
뼈대란 뼈대와 살점이란 살점이 합심해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맞서
대항한 이력 곳곳에 역력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담담하고 의연히 쇠락하길 바라며
덜컥 입도(入島)를 결심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이런 속내를 알아챈
조천 앞바다 수십수만 평이
우르르 우르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어떤 부호도 부럽지 않은
세금 한 푼 물지 않는

- 시집 <꿈결에 시를 베다>(실천문학, 2014)

* 감상 : 손세실리아 시인. 1963년 2월13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2001년 문예지 <사람의 문학>,<창작과 비평> 등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기차를 놓치다>(애지, 2006), <꿈결에 시를 베다>(실천문학사, 2014)가 있으며, 자서전적인 산문집 <그대라는 문장>(삶이 보이는 창, 2011), <섬에서 부르는 노래>(강, 2021년 12월)가 있습니다. 중3 국어교과서에 그녀의 시 ‘곰국 끓이던 날’(기차를 놓치다, 애지, 2006)이 수록되었습니다.

늘부터 3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될 협의회 행사 때문에 어제 제주도에 왔습니다. 직전 회장인 고문 자격으로 참석해야 하는 의무(?)도 이번이 마지막이라 감회가 남다르기도 합니다.

렇게 제주에 올 때마다 10여 년 전, 제주 조천읍에 <시인의 집>이라는 카페 겸 책방을 열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는 손세실리아 시인의 시를 한 편씩 꺼내 읽곤 했는데, 오늘도 그녀의 시집에서 한 편을 골라 봤습니다. 그동안 제주도에 올 때마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시인의 집’을 찾았듯이 이번에도 행사가 마무리되면 잠시 시간을 내서 들러보려고 합니다. 이 책방의 특징은 저자가 직접 사인을 한 책과 시집이 가득한 곳이며, 시인의 말대로 ‘수십수만 평’ 세금 한 푼 물지 않지만 조천 앞바다 풍경을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근사한 공간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시인이 처음 제주에 오기로 마음의 결심을 하게 된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사연이 담긴 시입니다. 시인은 오래된 폐가 한 채를 인격을 가진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목을 ‘낡은 집’이 아니라 ‘늙은 집’이라고 붙인 것부터 예사스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늙은 폐가가 견뎌 온 이력 속에서 시인 자신의 삶을 투영해 내고 있습니다.

주 조천의 바닷가에 다 쓰러져 가는 ‘늙은 폐가’ 한 채를 발견하고는 그 매력에 푹 빠져 덜컥 제주로 오기를 결심했다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시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볼까요. 시인은 처음 봤던 그 집의 앙상한 모습, 그러나 뼈와 살점처럼 드러난 석까래와 기둥 들이 서로 맞물려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폐가처럼 보이던 외관과는 달리 / 뼈대란 뼈대와 살점이란 살점이 합심해 /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맞서 / 대항한 이력 곳곳에 역력합니다’라고.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서로 합심해서 맞서 싸운 흔적이 시인은 그리도 감동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계속해서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 담담하고 의연히 쇠락하길 바라며’ 덜컥 그 집을 사고, 제주도로 오기로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시의 행간에서 읽히는 저간의 사연이 만만치 않음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지만, 이내 시인은 제주로 오는 결정이 ‘대박’이었음을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해피 엔딩, 아니 지금도 진행 중인 행복임을 노래하며 시를 마무리하고 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이런 속내를 알아챈 / 조천 앞바다 수십수만 평이 / 우르르 우르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 어떤 부호도 부럽지 않은’

인이 의연히 맞서 싸우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느 시인이 ‘천국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는 제목의 시에서 노래했듯이, 이 땅에서 우리는 온갖 숫자들을 채우느라 허덕이면서 그것들과 싸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파트 평수 넓히기, 남들보다 더 큰 자동차 배기량,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연봉, 높은 성적과 우수한 석차, 소위 일류병에 굴복한 우리를 유혹하는 광고판들은 지금도 ‘터번도 두르지 않은 / 아라비아 숫자들이 / 태양을 삼킨 채 / 광고탑에서 이글거리’면서 우리를 옥죄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집’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세태입니다. 자고 나면 아파트 가격이 올랐다느니 내렸다느니, 영순위 당첨권을 팔아 돈을 벌었다느니 온통 ‘돈’이라는 잣대로 집을 말하는 시대입니다.

런 세태 속에서 폐가 한 채 때문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니 어딘가 모자란 사람은 아닐까. 그러나 같은 시집에 있는 시인의 또 다른 짧은 시 하나를 읽으면 시인이 아파트 가격이 아니라, 진짜 부자는 무엇으로 만족하며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지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문전성시

- 손세실리아

해안가 마을 길에 찻집을 차린 지 달포
발길 뜸하리란 예상 뒤엎고 성업이다
좀먹어 심하게 얽은 가시나무 탁자 몇
좀처럼 빌 틈 없다 만석이다

기별없는 당신을 대신해
떼로 몰려와
종일 죽치다 가는

눈먼 보리숭어
귀 밝은 방게
남방노랑나비

- 시집 <꿈결에 시를 베다>(실천문학, 2014)

페 책방을 차린 지 달포, 찾는 발길이 없을까 염려했던 것은 기우였습니다. ‘시인의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참으로 다양했고 그 이름도 이뻤기 때문입니다. ‘눈먼 보리 숭어 / 귀 밝은 방게 / 남방노랑나비’....그들이 ‘떼로 몰려와 / 종일 죽치다 가는’ 곳이니, 그야말로 진짜 성업인 그곳은 대성공이었다고 노래하는 시인이 모자라거나 어리석은 사람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인은 날마다 하늘이 열리는 아침(조천(朝天))을 덤으로 누리고 있으니, ‘어떤 부호도 부럽지 않은’ 진짜 부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

난해부터 제주도에 딸린 작은 섬들을 둘러보기로 하고 지금까지 가파도, 차귀도, 비양도, 우도 등을 둘러보았는데, 이번에는 마라도를 다녀올 계획을 세워두었습니다. 궂은 날씨가 예보되어 있어 살짝 염려되긴 하지만, 마지막 제주의 가을 풍경 속에서 시인이 건져 올렸던, 그 ‘어떤 부호도 부럽지 않은’ 아름다운 것들을 가슴으로 담아가겠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