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석전碩田,제임스 2023. 6. 28. 19:13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촛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어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 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 조지훈 시선집 <산우집(山雨集)>(1956) 

* 감상 : 조지훈 시인.

1920년 12월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며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39년 4월 <문장>지에 ‘고풍의상’이 처음 정지용 시인에 의해 추천 되었고 그해 11월 ‘승무’, 그리고 1940년 ‘봉황수’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하였습니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의 강사를 역임하기도 했을 정도로 불경과 당시(唐詩)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 분야에 탐닉하였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 안동 출신 김난희(金蘭姬)와 결혼하였습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전국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6.25 전쟁 때에는 종군작가로 활약하기도 했는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내다가 1968년 5월, 평소 앓고 있던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기관지 확장증 등 합병증으로 마흔 아홉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습니다.

국 기상청은 올해 장마가 지난 6월 25일부터 전국적으로 동시에 시작되었다는 공식 발표를 하였습니다. 예년보다 한 주 정도가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 장마가 시작이 되었으니 앞으로 긴 기간 동안 오락가락 비가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비와 관련된 시를 한 편 꺼내 보았습니다.

난 주중 동국대학교에 근무하는 지인을 만나 점심 식사를 한 후, 남산 도서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또 다른 지인의 전시회를 보러 가기 위해 남산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그늘, 그리고 잘 정돈된 산책로가 얼마나 멋지던지요. 발아래로 펼쳐지는 서울 시내의 마천루 빌딩들과 그 건너에 우뚝 솟은 북한산 줄기를 보며 걷는 둘레길은 도심에서 즐길 수 있는 명품 산책로였습니다. 시원한 바람, 그리고 인위적이지만 흐르는 개울물 벗 삼아가 걷다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곳에 시비 하나가 서 있는 걸 발견했는데 걸음을 멈추고 차분하게 살펴보니 다름 아닌, 오늘 감상하는 ‘파초우(芭蕉雨)’가 새겨진 조지훈의 시비(詩碑)였습니다.

1971년 5월 17일에 세워진 이 시비는 ‘파초우’ 시 본문을 김응현(金膺顯)의 글씨체로 새겼고, 뒷면의 글은 시인 김종길(金宗吉)이 썼으며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서예가 배길기(裵吉基)의 글씨체로 새겨넣은 역작이었습니다. 그가 짧은 생을 마감하고 떠난 3년이 지난 1971년, 그를 기리기 위하여 시우(詩友)들과 제자들이 시비 건립위원회를 결성하고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수많은 시 중에서 ‘파초우’를 선택했던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지훈은 일제에 순응한 어용 문학단체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하라는 강요를 받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문인 보국회 회원들은 조지훈을 증오하며 활동을 방해했습니다. 조지훈은 문단 선후배들의 변절에서 서글픔과 착잡함을 느끼며 마음 쉬일 곳을 찾아 경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괴로워서 더욱 고단했던 여행길에서 시 '파초우'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경주에서 다정한 친구 박목월(朴木月)을 만나 술을 마시며 이 땅의 한(恨)을 이야기했고, 시 '완화삼(玩花衫) - 목월에게'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의 암흑기에 뜻있는 청년이 역사적 현실의 부조리에 부딪혀 낙향(落鄕), 울적한 나날을 보낼 때의 심정을 생각하면 이 시를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시에 등장하는 ‘한 송이 구름’은 시적 화자인 시인 자신을 의인화한 시적 은유입니다. 1연에 등장하는 ‘외로이 흘러간’ 구름과 마지막 연의 ‘스쳐간 구름’, 즉 시인은 이 땅 어디에서도 마음 둘 곳이 없음을 ‘이 밤을 어디메서 / 쉬리라던고’라는 수미상관(首尾相關) 반복 시어로 안타까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제 장마가 시작되었으니 한동안 비가 계속될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페루 연안의 해수 온도가 높아지는 ‘엘리뇨 현상’이 시작되는 올해에는 폭염을 동반한 장마가 길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7월에는 단 3일만 제외하고 매일 흐리고 비가 온다느니, 엄청난 폭염과 폭우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느니 기상과 관련하여 유언비어성 이야기들까지 난무하고 있습니다.

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성긴 빗방울 / 파촛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 창 열고 푸른 산과 / 마조 앉어라’ 노래했던 시인처럼, 비록 지루한 장마가 예고되어 있지만, 유유자적 빗소리 리듬 삼아 푸른 산 자연을 마주하며 ‘Here & Now’를 만끽할 수 있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