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399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시집(한길, 2009) - 1953..

시구문 / 고매사 - 정호

시구문 - 정호 둘레길 벗어나 원효봉 향한다 선발대는 벌써 시구문을 지났다는 카톡이 온다 詩句文이겠거니, 명필의 필치가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거나 어느 문장가의 싯귀 하나 암벽에 들러붙어 있을 법한, 아니면 반정으로 겨우 도망쳐 나온 어느 왕족이 복귀를 꿈꾸며 호시탐탐하던 時求門이었거나 그도 아니면 侍龜門이어서 거대한 거북바위 하나 계곡 암반에 엎드려 있을 것 같은 詩句 時求 侍龜 다 아니라면 始球는 절대 아니겠고 枾九, 市區, 혹시 뻐꾸기 산비둘기 많아서 鳲鸠門? 아님 누룽지 달라 꼬리치는 媤狗인가? 그도 아니라면 중성문 대남문을 비롯한 아홉 개의 문이 있다는 건지 가파른 돌계단 오를 때마다 궁금증 하나씩 배낭에 주워 담으며 시구시구, 에라 얼씨구절씨구/ 땀 뻘뻘 도달한 시구문, 죽어서도 괄시받던 민초의..

춘몽(春夢) / 시집보내다 - 오탁번

춘몽(春夢) - 오탁번 아내와 함께 스포티지 몰고 홍쌍리 매화마을로 매화구경을 갔다 한창 피어나던 매화는 꽃샘추위에 엇, 추워! 하면서 올스톱, 피다만 매화만 싱겁게 구경하고 내친김에 핸들을 꺾었다 장흥에서 제주 성산포행 카페리를 탔다 사람은 3만8천원, 자동차는 6만8천원 넘실대는 푸른 봄바다는 공짜! 이중섭의 아내같이 생긴 수선화도 추사의 족제비붓 같은 솔잎도 재재재재 춥다 한라산 산록을 재는 측량기사인듯 몇 번이고 돌고 돌았다 흑석영(黑石英)처럼 빛나는 까마귀떼와 눈 쌓인 한라산이 부운(浮雲)처럼 다 하릴없다 이틀을 묵고 떠나는 날 아침 조천 바닷가에 있는 조붓한 '시인의 집'에 차 마시러 갔다 손세실리아 시인이 꼭 어느 낭만 시인의 아내인듯 사는 곳 방명록에 한 줄 쓰라는 말에 나는 붓펜으로 일필..

바람쟁이 하나쯤 / 땜쟁이 노래 - 정양

바람쟁이 하나쯤 - 정양 마을 여인네들 일을 성민이는 절대로 입에 담지 않지만 마을 여인네들 아닌 경우 술자리에서 가끔씩 안주 삼을 때도 있었다 어느 초가을 오후 성민이가 낯선 들길을 지나다가 새 보는 아낙네를 덮쳤는데 가마니 깔린 논두렁에 납작 깔린 그 아낙네, 나이 좀 지긋했던지 자네는 어머니도 없냐고 나무라듯 원망하듯 하면서도 하여튼지 간에 고마운 젊은이라며 성민이 까 내린 볼기짝을 덥썩 껴안으며 쓰다듬으며 하더란다 마재마을 이런저런 쟁이들 지금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지만 예나 이제나 허망하고 팍팍한 한세상에 그런 바람쟁이 하나쯤 그 마을에 아직도 남아있으면 좋겠다 - 시집 (모악, 2023) * 감상 : 정양 시인. 1942년 전북 김제읍 신풍리에서 사회운동가인 정을(鄭乙), 보통학교 교사인 노..

안부 전화 - 나태주

안부 전화 - 나태주 지금 어디에 있어요? 누구하고 무엇하고 있나요? 예전엔 그렇게 물었는데 요즘은 다만 이렇게 묻고 말한다 별일 없지요? 네, 이쪽도 아직은 별일 없어요. - 시집 (열림원, 2022) * 감상 : 나태주 시인. 1945년 3월 충남 서천군 시초면 초현리 111번지 그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공주사범학교와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1964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오랫동안 재직했습니다. 2007년 공주 장기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43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친 뒤, 공주문화원장을 거쳐 현재는 공주 풀꽃문학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71년 신춘문예에서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등단 이후 끊임없는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수천 편에 이르는 시 작품을 발표해왔으며, 쉽고 간결..

카살스 - 진은영

카살스 - 진은영 음악은 – 밤의 망가진 다리 하느님이 다리를 절며 걸어 나오신다 음악은 – 영혼의 가느다란 빛나는 갈비뼈 물질의 얇은 살갗을 뚫고 나온 음악은 – 호박琥珀에 갇힌 푸른 깃털 한 사람이 나무로 만든 심장 속에서 시간의 보석을 부수고 있다 음악은 – 무의미 우주 끝까지 닿아 있는 부드러운 달의 날개 아래서 길들은 펼쳐졌다 잠이 들었지 - 시집 (문학과지성사, 2022) * 감상 : 진은영 시인, 철학자, 교수.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나서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니체와 차이의 철학’입니다. 2000년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외 3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는 (문학과지성사, 2003), (문학과지성사, 2008),..

덧없이 떠도는 想念 / 종지기 소년 - 배주선

덧없이 떠도는 想念 - ‘하늘과 바다 사이’ 찻집에서 - 배주선 하늘과 바다 사이 허공虛空 남색 치마 풀 먹여 펼친 하늘에 백저포白苧布 몇 점 노 젓고 갯바위에 대를 띄운, 몇 사내 오히려 한가롭다 * 옛날 옛적 가난한 어부가 황금고기를 낚았네 용궁의 왕자였네 살려달라 애걸복걸했네 마음씨 좋은 어부 놓아줬네 심술머리 사나운 마누라 부자 될걸 놓쳤다고 야단이네 어부는 금고기를 찾아갔네 그날부터 날마다 성찬이네 욕심 많은 마누라 집이 게딱지라고 심통 부리네 어부는 금고기를 찾아갔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하인들도 거느리게 됐네 팔자 펴진 마누라 왕비가 되고 싶다고 앙탈이네 큰일 났네 마누라 왕비 되려면 어부가 임금이 되어야 하는데 어부는 금고기를 찾아갔네 금고기는 슬픈 표정으로 말없이 물속으로 들어갔네 고래..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올라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시집 (문학과지성, 2007) * 감상 : 한강. 소설가, 시인. 1970년 11월27일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풍문여고와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93년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 등 시 4 편을 실으며 시인으로 먼저 등단하였고, 이듬해인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붉은 닻’이 당선되며 소설가로 문단에 나왔습니다. 소설가 한승원의 딸로, 부녀가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문학인으로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95년 첫 소설집 (문학과지성) 이..

불멸(천개의 바람이 되어) - 클레어 하너

불멸 - 클레어 하너 나의 무덤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될게요. 가을엔 곡식들을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될게요. 아침엔 종달새 되어 잠든 당신을 깨워 줄게요. 밤에는 어둠 속에 별 되어 당신을 지켜 줄게요. 나의 무덤 앞에서 서 있는 그대. 제발 눈물을 멈춰요. 나는 그곳에 있지 않아요. 죽었다고 생각 말아요. - Poetry Magazine (1934. 12) Immortality - Clare Harner Do not stand By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

겨울밤 - 이재무

겨울밤 - 이재무​ 싸락눈이 내리고 날은 저물어 길은 보이지 않고 목쉰 개 울음만 빙판에 자꾸 엎어지는데 식전에 나간 아부지 여태 돌아오시지 않는다 세 번 데운 황새기 장국은 쫄고 벽시계가 열한 시를 친다 무거워 오는 졸음을 쫓고 문고리를 흔드는 기침 소리에 놀라 문 열면 싸대기를 때리는 바람 이불 속 묻어둔 밥 다독거리다 밤은 깊어 살강 뒤지는 생쥐 소리 서울행 기적 소리 들리고 오 리 밖 상엿집 지나 숱한 설움 짊어지고 된바람 헤쳐오는 가뿐 숨소리 들린다 여태 아부지는 오시지 않고 - 시집 (청사, 1987.12) (천년의 시작, 2003) * 감상 : 이재무 시인. 1958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했습니다.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고 1983년 , , 등..

책을 끓이다 - 장현숙

책을 끓이다 - 장현숙​​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건 그 자..

신문 2 / 그 시인 - 이영광

신문2 - 이영광 잡지 편집자는 고운 목소리로 잘도 날 신문(訊問)해서, 청탁을 성사시켜버린다 너무 쉽게 자백해 큰일 난 나는 몇 문장만 얻어 보려고 나를 신문한다 내가 신문하는 시늉만 하니까 나는 나에게 벙어리 시늉만 한다 신문하던 나는 지쳐 신문받던 나를 집에 두고 여기저기 걷는다 허기를 잊고 교외로 나가다 보면 어느새 저만치 신문받던 내가 뒤따라오고 있다 우물쭈물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부르면 등 돌리고 아무 말이 없다 돌아오는 길은 축축이 봄비가 내려 우산을 받고 걷는다 걷다가 또 돌아보면, 신문받던 내가 여전 뒤처져 오고 있다 무슨 말을 우물거린 듯한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고 전봇대 아래 서 있다 우산을 씌워주려고 다가가면 다 젖어 비칠비칠 물러난다 기운이 없..

회갑回甲 - 김용락

회갑回甲 - 김용락 회갑 날 아침 서울의 빈방에서 혼자 눈을 떴다 요즘 환갑이 어디 있냐고 가족에게 말은 했지만 묘하게도 마음이 조금은 허전한 듯도 했다 여느 날처럼 빈속으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출근했다 딱 34년 전 늦가을 어느 날 갑자甲子생 아버지의 회갑을 했다 평생을 농부로 살아온 무뚝뚝하고 말이 없으시던 6남매 아버지 그해 타작을 막 끝낸 넓은 시골 마당에는 인심 좋았던 아버지의 환한 마음처럼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 많은 축하객들로 꽉 찼다 최전방 GOP 군대에서 철책을 지키던 막내아들은 부대에서 특별 휴가를 허락하지 않아 빠졌다 미혼인 큰아들과 네 명의 딸과 사위들만으로도 아버지 어머니는 벌써 흥에 겨우셨다 한마을에 살던 종형과 재종형이 중심이 되어 중짜 돈과 새깨 돼지를 잡아 고기가 풍년이 되..

달보다 먼 곳 ; 김시종 / 시를 쓴다는 일 - 김수열

달보다 먼 곳 - 김시종 - 김수열 오사카 영사관으로부터 귀국 권유받은 적 있었습니다 광주 항쟁 시집 준비하는 걸 알고, 방일 준비하던 전두환 쪽에서 체면이 안 섰는지, 서울에서 출판하라 압박했습니다 ‘제주 4.3’에서 살아남은 자로서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김영삼 때, 서울문학인대회 초청받았는데, 영사관에서 ‘다음 방한에는 한국 국적으로 바꾼다’는 서약서 강요했습니다 조선적(朝鮮籍)이던 나는 거절했습니다 주최측 노력으로 어찌어찌 참가는 했지만, 행선지는 서울로 한정되었습니다 4.3 진상규명에 나선 김대중 대통령 때에야 조선국적 임시여권으로, 1949년 도일(渡日)하고 처음으로, 처음으로 제주에 올 수 있었습니다 항쟁 당시 희생된 동지들 뵐 낯이 없어 마음 무거웠는데, “어서 오세요” 조카딸이 울먹이며..

냇물의 목소리 / 호미 - 황규관

냇물의 목소리 - 김종철 선생님 영전에 - 황규관 1 함께 아픈 강에 가시자 했더니 밥과 술을 먹자 했습니다 대도시의 골목에서, 무슨 말을 나눴는지 기억은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면서 제게 주시던 웃음만 기억납니다 내 못남이 조금 맘에 들으셨구나 하는 불빛이 너무 높지 않은 전압으로 제 몸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너무 아둔했습니다 일자무식, 어둑한 자아였습니다 제 입에서 강이 나오고 선생님이 밥과 술을 흘려주신 순간이 제게는 역사(役事)같습니다 아니 지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글로 불세례를 주시고 말과 웃음으로 침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냥 콸콸 솟는 지하수였습니다 마른 논에 천천히 들어오는 물줄기였습니다 어린모가 조금 환해졌습니다 2 아버지 없던 시간에 아버지를 할 수 있는 한 멀리 내쫓으려 했던 기억에 ..

갈비뼈를 얻다 / 밥이나 하라는 말 - 문동만

갈비뼈를 얻다 - 문동만 자전거를 타고 핸들을 꺾다 하늘로 떠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유리창에 부딪힌 새처럼 바닥에 널브러졌고 집으로 가는 길은 아득해졌습니다. 사위도 정신도 어두워지고 어렴풋이 누군가들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측백나무와 은사시 울타리, 장 보러 가다 말고, 버스를 타러 가다 말고, 약 사러 가다 말고, 가다 말고, 말고 라는 발걸음이, 멈춰 선 발걸음들이 멈추려는 숨을 살렸듯, 그들이 차를 한편으로 통행시키며 구급차를 불러주고 말을 시키며 연고를 물어주던, 소란하되 나지막한 숨결들이었습니다. 안부를 물어주던 핏줄들이 물 같은 피가 됐으므로, 나는 나를 물어주는 말들이 그리웠을 겁니다. 생각나지도 않는 그녀들이 누구였을까요. 누이였을까요, 엄마였고 동창이었을까요, 식당에서 밥 주..

큰사람 /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큰사람 - 김명기 장자인 나는 집안에서 처음 대학을 갔다 마을에서도 유일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대학이 못마땅해 통박을 주었고 엄마는 당신은 초등학교도 못 나왔는데 그게 어디냐며 통박을 통박으로 맞받았다 여든 살이나 자신 할머니는 밍기가 이제 큰사람 될 거라고 두고 보라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셨다 할머니는 끼니 때마다 반주 두 잔을 곁들였는데 나는 큰사람이 되기 위해 가끔 반주를 함께 마시기도 하고 주말이나 방학 때면 집 앞 여울가에 나란히 앉아 아버지 몰래 박하맛 나는 수정담배를 나누어 피우기도 했다 그럴 때면 우리 큰새끼 우야든지 마이 배워 꼭 큰사람 되라고 말하시던 할머니 어느 해 이맘쯤 조반과 반주 두 잔을 달게 드시고 짱짱한 가을볕 속으로 꼿꼿하게 떠나셨다 나는 큰사람이 되기 위해 객지와 ..

명함 - 손세실리아

명함 - 손 세실리아 묵은 명함을 수북이 늘어놓고 정리하던 제주도 '각' 출판사 박경훈 대표가 마침 민예총 소식지 교정 보러 나온 김수열 시인에게 뜬금없이 내 안부를 묻더란다 시 쓰는 놈치고 제대로 된 명함 가지고 다니는 걸 아직 한 번도 못 봤다고, 남의 명함 얻어서 뒷면에 연락처 휘갈겨 쓰는 인간들은 십중팔구 시인이더라고, 그 말 끝에 안부를 묻는 걸로 미루어 모르긴 몰라도 누군가의 명함 뒷면에 민폐를 끼친 사람 중에 너도 포함된 모양이더라고 전언하신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번듯한 명함 한 장 가져본 기억이 없다 깎이고 접힌 곳까지 평평히 펴놓고 사방팔방 둘러봐도 가로 9센티 세로 5센티로 된 직사각 방 한 칸 단장하고 채워넣을 속세의 세간 전무하다 날은 차디찬데 마른 장작에 불붙여 조개탄 올려놓을 무..

산다는 것은 / 혀로 밭을 갈다 - 이영춘

산다는 것은 - 이영춘 산다는 것은, 만나는 일이다 사랑하는 일이다 헤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빈 가슴 털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 일이다 먼 산 바라보며 그 안에 내 얼굴, 내 발자욱, 내 그림자 그려 넣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견디는 일이다 갈등하는 일이다 매일매일 육중한 시간에 눌려 실타래 풀어가듯 그렇게 인생을 풀어가는 일이다 수틀에 수(繡)를 놓듯 그렇게 인생을 짜가는 일이다 가다가 큰 바다에 이르면 거기서 내 얼굴 찾아 물기를 닦아 내고 또 가다가 큰 산에 이르면 거기서 한숨 돌려 휘파람 부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일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일 이것이 인생의 주제다 오늘도 우리는 그 주제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 다음 카페 에서 * 감상 : 이영춘 시인. 1941년 2월,..

시가 있는 아침 - 강동수

시가 있는 아침 - 강동수 문틈에 배달되는 조간신문이 날마다 시 한 편을 달고 온다 주석이 달린 처음 만나는 아침의 언어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왜 시 한 편을 건질 수 없었는지 언어의 사유에 감동하고 나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을 스쳐 지나듯 증권소식과 지구 반대편 전쟁소식들을 뒤판으로 넘기며 아침이 바삐 지나간다 전쟁과 평화 그 사이에 시가 있다 날마다 시 한 편을 달고 오는 사이 전쟁으로 몇몇은 죽고 누군가는 시 한 편을 쓰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무 일도 없는 듯 - 시집 (시와소금, 2018) * 감상 : 강동수 시인. 강원 삼척 출생. 2002년 으로 시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2008년 계간지 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2009년 제19회 대한민국장애인 문학상 최우수상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