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셨다는 말
- 황유원
참 좋다
주위를 둘러보면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 천지이지만
돌아갈 곳 아무 데도 없어도
집도 절도 없어도
돌아가고 나면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한다는거
누구나 결국 돌아가고
누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거
어디로 돌아갔는진 모르겠지만
흔히들 하는 말처럼 그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 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지난 몇 년 사이에만 해도 정말 다들
돌아가셨다는 거
말은 가끔 씨가 되고
돌아가시다, 라는 말이 있어
우리 모두
돌아갈 곳 생긴다는 거
참 좋다
늦은 밤 장례식장 갔다 돌아와도 도무지
돌아온 것 같지 않은 기분인 그런 날
돌아가셨습니다, 라는 말의 씨에서 싹이 돋아나
흙을 뚫고 청청하게 솟아오르는 상상에 젖다보면
어느새 세상모르고 다들
잠들어 있다는 거
- 시집 <하얀 사슴 연못>(창비, 2023)
* 감상 : 황유원 시인.
1982년 울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와 철학과를 졸업했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해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 2015),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현대문학, 2019), <초자연적 3D 프린팅>(문학동네, 2022), <하얀 사슴 연못>(창비, 2023) 등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는 <모비 딕>(문학동네, 2019), <시인 X>(비룡소, 2020), <올 댓 맨 이즈>(문학동네, 2019), <슬픔은 날개 달린 것>(문학동네, 2020), <래니>(문학동네, 2021), <바닷가에서>(문학동네, 2022), <폭풍의 언덕>(휴머니스트, 2022), <노인과 바다>(휴머니스트, 2023),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웅진주니어, 2023), <밥 딜런: 시가 된 노래들 1961-2012>(공역)(문학동네, 2016), <밤의 해변에서 혼자>(ITTA, 2019), <예언자>(민음사, 2018), <소설의 기술>(교유서가, 2018) 등이 있습니다.
2015년에는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로 제34회 김수영 문학상, 2022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그리고 2023년에는 김현문학패를 수상하였습니다.
며칠 전 전혀 예상치 못한 슬픈 부고(訃告)를 하나 받았습니다. 배드민턴 운동을 하는 친구여서 가끔 친구가 속해 있는 체육관에 가서 함께 운동하면서 소통하던 친한 친구였는데, 건강하게 집에 있던 남편이 낙상 사고를 당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보내왔으니 황당하고 당황스러웠지요. 부랴부랴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일을 당한 친구는 울다 지쳐서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몹시 힘겨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날 밤 조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한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올해 구입했던 첫 번째 책, 지난 몇 주간 동안 침대 머리맡에 두고 한 편 한 편 읽어나가고 있던 황유원 시인의 시집이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런 혼란스러운 장면과 비슷한 시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시집을 뒤적여 오늘 감상하는 이 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읽고 또 읽으면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시인도 어느 ‘늦은 밤 장례식장 갔다 돌아와도 도무지 / 돌아온 것 같지 않은 기분인 그런 날’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왔다가 홀연히 육체를 떠나 저세상으로 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우리 말 표현으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여러 번 곱씹으면서 ‘참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쉽게 잠 오지 않는 그 밤, 시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 천지이지만 / 돌아갈 곳 아무 데도 없어도 / 집도 절도 없어도 / 돌아가고 나면 / 돌아가셨습니다, / 라고 한다는거’ 그게 참 좋다고 시인은 리듬을 살려 읊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은 가끔 씨가 되고 / 돌아가시다, 라는 말이 있어 / 우리 모두 / 돌아갈 곳 생긴다는 거’라면서 ‘말은 가끔 씨가 되’는 생각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결국 시인의 생각은 ‘말의 씨에서 싹이 돋아나 / 흙을 뚫고 청청하게 솟아오르는 상상’에까지 젖어 들게 됩니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 시에서 시적 은유로 작용하는 한 문장을 툭 던져 넣음으로써 시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그 생각에 ‘젖다 보면 / 어느새 세상모르고 다들 / 잠들어 있다는 거’라는 문장이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가 우리 모두 결국 어딘가로 돌아가, 그곳에서 청청하게 돋아난 새싹이 될 어딘가가 있기에 더 이상 잠 못 이룰 이유가 없다는 거, 그래서 시인은 이 시를 읽는 모두에게 위로가 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황유원 시인의 시는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자꾸 반복해서 읽으면 각각의 시어들에서 마치 운율이 되살아나는 듯 리듬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시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시어가 ‘돌아가셨습니다, 라는’이라는 표현인데, 이 시어를 각각의 연에 한 번씩 위치시키면서 반복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따옴표(“”)를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소리를 내서 이 시어를 발음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장치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렇게 말로 발설하는 순간, 그것은 ‘말의 씨’가 되어 결국 ‘싹이 돋아나 / 흙을 뚫고 청청하게 솟아오르는 상상’으로까지 비상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황 시인이 이렇듯, 그의 시에서 시어들을 운율과 리듬까지 감안하여 정교하게 배치하는 것은 아마도 그가 문장과 말의 영향력을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성공한 번역가’로서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가 최근 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2023)를 새롭게 번역해 낸 후, 번역가로서의 소감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의 말을 직접 한번 옮겨 보겠습니다.
‘같은 작품이라도 번역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작품이 다르게 다가온다. 노인과 바다의 원문은 쉼표로 줄줄이 이어진 복문이 많고 대화문은 극도로 짧다. 말하자면 원문 나름의 긴장감과 리듬이 존재하는데 그런 부분이 드러나도록 심혈을 기울일 때 새로운 번역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심혈을 기울인 번역본 하나쯤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번역이 아니라면 새 번역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정교한 번역, 그것은 단지 더 읽기 쉽게 바꾸는 게 아니라 본래의 작품에 더욱 가까워진다는 의미로서의 작업입니다. 첫 번째 언어에 담긴 정서, 형식, 내용뿐만 아니라 이국의 언어를 읽는 얼마간의 불편함까지 제대로 구현해 내야 하는 치열한 번역 작업을 통해서 내면에서 갈고 닦은 자신만의 힘센 언어와 서정을 구사할 줄 아는 시인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황유원 시인의 약력을 일별(一瞥)하다가, 그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했다는 사실에서, 불현듯 지난해 9월 우리 곁을 황망히 떠나 ‘돌아가신 분’이 생각났습니다.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정년을 몇 년 남겨둔 채 명예퇴직한 후 강화도 내가면에 공부와 명상의 집, [심도학사(尋道學舍)]를 세워 뜻있는 사람들과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연구를 펼쳐온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
퇴임 후 강화로 갈 계획을 세우고 한창 강화도를 열심히 드나들 때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몇 번의 만남 후 조금 친해진 어느 날, 강화로 오는 진짜 이유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거창하게 건물을 짓고 뭔가를 도모하려는 나의 계획을 차분히 듣더니,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 선생, 쓸데없는 일 하지 마세요. 이 시설들을 보세요. 텅텅 비어 있잖아요. 그런 선한 뜻이 있으면 얼마든지 이곳을 그냥 활용하세요. 그런 시도는 어리석은 저 하나만으로 족합니다’라고 극구 말리시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삶 자체가 겸손과 포용으로 가득하셨던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 얼마나 황망했던지요!
‘누구나 결국 돌아가고 / 누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거’, 그리고 시인의 말대로, ‘생각해 보면 지난 몇 년 사이에만 해도 정말 다들’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남아 있는 우리에게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말도 되므로, 그냥 참 좋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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