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책
- 주응규
머리맡의 얼어버린 자리끼같이
천지간이 정적에 잠겼다가
쩡쩡 갈라지는 겨울 속을 걷는다
뭇발길에 비켜선 먼 산자락
절벽에 뿌리내린 노송은
잔솔가지에 백화(白花)를
난만히 피운 채
의연한 기백이 푸르르다
고드름같이 하얗게 날이 선
창백한 햇살을 흠빨며
근근이 목숨 줄을 부지하는
무수한 생명이 실살스레
봄을 피우기에 분주하다
자연의 맥박이 쉼 없이 고동쳐
분홍 꿈을 시나브로 투영하는
삶은 한겨울 날의 산책 같다
- 시집 <꽃보다 너>(시음사, 2021)
* 감상 : 주응규 시인. 호는 허천(虛天).
경북 울진 태생으로 2011년 <대한 문학세계>을 통해 시와 수필로 등단,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人生은 詩가 되어 흐른다>(시음, 2013), <삶이 흐르는 여울목>(아토즈에듀, 2014), <시간 위를 걷다>(시음, 2015), <꽃보다 너>(시음, 2021) 등이 있으며, 수필집 <햇살이 머무는 뜨락>(시음, 2016)이 있습니다. 2016년 윤봉길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지난주 극한의 한파가 몰아친 어느 날 아침, 집 바로 뒤에 있는 북한산 산책로를 걷다가 늘 같은 길을 걸었는데도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느꼈습니다. 올겨울 들어 처음으로 서릿발을 밟은 것입니다.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발밑에서 허물어지는 서릿발 소리를 들으며,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이게 바로 봄이 오는 소리구나’하는 생각 말입니다. 서릿발이 생긴다는 건, 바깥 기온은 매서운 영하의 날씨지만 깊은 땅으로부터 이미 봄의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음을 자연 스스로 증명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즈음 한 겨울에 산책하다가 봄기운을 노래한 시는 없을까 검색하다가 주응규 시인의 바로 이 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겨울 산책을 하는 시인은 1연과 2연에서 매서운 한겨울의 한파를 맘껏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렵던 시절 머리맡에 놔둬서 긴 겨울밤을 보낼 때 시장끼를 달래던 물그릇인 ‘자리끼’가 얼 정도로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입니다. 그리고 산책길 저 멀리 올려다본 산 위의 노송들은 ‘잔솔가지에 백화(白花)를 / 난만히 피운 채’ 당당한 기백으로 서 있지만, 춥고 배고픈 우리네 삶과 닮은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3, 4연에서 시인은 그런 추위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봄이 바로 앞에 있음을 ‘자연의 맥박이 쉼 없이 고동쳐 / 분홍 꿈을 시나브로 투영하는 / 삶은 한겨울 날의 산책 같다’고 노래하며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에 ‘분홍 꿈’ 축복처럼 다가올 봄의 기운을, 시를 읽는 독자들이 맘껏 느낄 수 있도록 힘차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쩡쩡 갈라지는 겨울 속을’ 산책하다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봄을 피우기에 분주’한 무수한 생명들을 느낀 모양입니다. 그리고 극한의 추위 속에서도 몸부림치며 생명을 태동시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인이 가져온 시어들이 참으로 이쁩니다. ‘실살스레’라는 말과 ‘시나브로’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실살스럽다’는 말은 ‘겉으로 드러나거나 객쩍은 것이 없고 내용이 충실하게’라는 뜻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또 ‘시나브로’는 부사어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이라는 순우리말 중 하나입니다.
맞습니다. 어느새 봄이 실살스레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배드민턴을 치지 않는 날이면 어김없이 오르는 폭포동 북한산 둘레길 옆에, 시 한 편을 소개하는 팻말이 뜬금없이 서 있습니다. 제목을 봐선 봄을 노래한 시이지만, 시의 본문에는 ‘봄’이라는 시어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공감이 되는 멋진 시입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 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시선집, <그대 앞에 봄이 있다>(문학세계사, 2017)
아마도 이 시를 쓴 김종해 시인도 꼭 이맘때쯤, 엄동설한 얼음 아래에서 이미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봄기운을 감지하고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 살아가는 삶이 바람 불고 파도치는 겨울의 격랑과도 같지만 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다가올 봄, 꽃 필 차례가 이 매서운 겨울을 잘 견뎌낸 ‘바로 그대 앞에 있다’고 격려하며 응원하는 희망의 찬가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이미 가까운 것처럼 시나브로 우리 곁에 와 있는 봄을 맞으러 문을 활짝 열고 지금 바깥으로 한번 나가 보시죠.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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