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빈등貧燈에게 - 정공채 / 한 잔 술 - 공초 오상순

석전碩田,제임스 2024. 2. 14. 06:24

빈등(貧燈)에게

- 정공채

누가 한 잔 술에 눈물 난다고 했지
어두운 귀로(歸路)에
발걸음이 무거운 사람
산번지(山番地) 높은 달동네 외등. 
몇 번씩이고 숨차고 몇 갈래이고
모퉁이 길을 돌아 오르는
사설(辭說)도 다 지워진 바람의 언저리 길 
외등 또 하나
고맙네.
몹시 추운 겨울 밤중에도
떨면서 불 켜고 혼자 저립(佇立)한
이 외등.
아, 고맙고 고맙네
한 잔 술에도 눈물 난다 하였거늘......

- 육필 시선집 <배 처음 띄우는 날>(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 감상 : 정공채 시인. 호는 성촌(星村).

1934년 12월,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에서 태어났고 2008년 4월 30일 폐암으로 향년 74세의 일기로 타계하였습니다. 진주 농고를 거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1957년에 졸업하였으며, 1957년 <현대문학>에 시 ‘종이 운다’, ‘여진(女眞)’, ‘하늘과 아들’ 등 3편의 시가 박두진 시인에 의해 추천되어 등단하였습니다.

1960년 4월 14일, ‘하늘이여’라는 시가 <국제 신보>(현 국제신문) 1면 사설란에 실리면서 ‘4.19 혁명’을 촉발하는 항거 시를 쓴 사람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 시는 3.15 부정 선거에 항거해 일어났다가 죽은 김주열(金朱烈, 1943~1960)의 죽음에 격분하여 쓴 시였는데 당시 국제 신보의 편집국장 이병주(李炳注, 1921~1992, 경남 하동군 북천 출신)가 동향의 젊은 문인 후배 정공채 시인의 시를 사설 대신에 실었던 것. 그 후 그는 시 ‘열차’, ‘석탄’, ‘행동’, ‘대리석’, ‘우중의 다리 위를 거닐며’, ‘부두’ 등의 시를 활발하게 발표하면서 전후 한국 문학의 총아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 그의 장시(長詩) ‘미8군의 차’를 <현대문학>에 게재하였는데 이 시가 일본의 진보 문학지에 번역되어 실리는 바람에 필화 사건으로 번지는 큰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면서 개인적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학 졸업 후, 부산일보, 학원사, 민족일보 기자, 문화방송 프로듀서 등을 거쳐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 현대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9년 현대문학상, 1981년 제1회 한국문학협회상, 1998년 편운문학상, 한국문인협회상, 2004년 한국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집으로 <정공채 시집 있습니까>(유림사, 1979), <해점(海店)>(관동 출판사, 1981), <목로 주점>(백양 출판사, 1982), <아리랑>(오상 출판사, 1982), <사람 소리>(평야, 1985), <땅에 글을 쓰다>(신원 문화사, 1988), <새로운 우수>(제3의 문학, 2000) 등이 있으며, 평전 <아! 전혜린 – 평전>(문학 예술사, 1978), <우리 노천명 – 평전>(대가 출판사, 1980), <우리 어디서 만나랴 - 공초 오상순 평전>(백양 출판사, 1982), 수필집 <비에 젖읍시다>(문학예술사, 1971), <너의 아침에서 나의 저녁까지>(문음사, 1989), 역사 소설 <초한지, 전3권>(홍신 문화사, 1980), <오늘은 어찌하랴 - 김삿갓 시와 인생>(학원사, 1979), 우화집 <정공채 이솝우화>(백양 출판사, 1981) 등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파트로 뒤덮여 있는 지금의 서울의 풍경은 3, 40년 전만 해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서울역을 중심으로 한 종로나 을지로 등 번화가를 제외하면 서울의 집들은 오르락내리락 산비탈에 다닥다닥 산 정상까지 빽빽하게 들어선, 소위 ‘달동네’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던 1974년, 처음 서울로 전학을 왔을 때 살았던 집은 성동구 하왕십리 산 1038번지, 산비탈에 있었던 고모님 집이었습니다. 무학 초등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시장통 골목길을 걸어 한참 들어오면, 유리 공장이 있고 그곳을 지나 다시 왼쪽 꼬불꼬불 골목길을 한참 오르면 있었습니다. 그래도 고모 집은 별로 높지 않았고 비교적 산 아래 위치했습니다. 그곳에서 한참 더 높이 올라가야 하는 집들도 수두룩했으니까 말입니다. 1년 후 혜화동에 있는 경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처를 미아 삼거리 근처 삼양동으로 옮겼는데, 그곳도 역시 달동네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몇 년 전, 옛 추억을 더듬으며 내가 학창 시절 살았던 왕십리와 삼양동을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연실색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빽빽이 들어선 동네는 그 지형마저 완전히 바뀌어서 어디가 어딘지 조차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늘 감상하는 정공채 시인의 시는 바로 70년대의 이런 서울의 달동네를 상상하면서 읽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을씨년스러운 달동네 산비탈 골목길, 가끔 ‘찹쌀떡~’을 외치는 떡장수의 목소리만 처량하게 들리는 추운 겨울밤, 한 모퉁이를 돌 때마다 홀로 외로이 서서 불을 밝히고 있는 ‘외등’이 서 있는 풍경 말입니다. 그 외등을 그냥 외등이라 제목을 달지 않고 ‘빈등’이라 부르며 다정하게 고마움을 표하는 시처럼 보이지만, 시의 행간에서 읽히는 느낌은 그저 그런 달동네 외등이 있는 겨울 풍경을 노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선, 외롭게 골목길을 밝히고 서 있는 외등을 ‘빈등(貧燈)’이라고 제목을 단 것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빈등은 원래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고사성어에서 시인이 차용(借用)했음이 분명합니다. 원래 이 말은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하나의 등(燈)이라는 뜻으로, 물질의 많고 적음보다 정성이 중요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왕이 부처에게 바친 백 개의 등(燈)은 밤사이에 다 꺼졌으나 가난한 노파 난타(難陀)가 정성으로 바친 하나의 등은 꺼지지 않았다는 불경(佛經) 현우인연경(賢愚因緣經) 제3권에 실려있는 빈녀난타(貧女難陀)의 이야기에서 유래합니다.

가가 사위국(舍衛國)의 어느 정사(精舍)에 머물고 있을 때 그곳 국왕을 비롯해 사람들은 각각의 신분에 맞는 공양을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느 가난한 여인이 ‘모처럼 스님을 뵙게 되었는데도 아무런 공양도 할 수 없다니 정말 슬픈 일이다’라고 한탄하다가 온종일 구걸하여 얻은 돈 ‘한 푼’을 가지고 기름집으로 갔습니다. 한 푼어치 기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나 그 여인의 말을 들은 기름집 주인은 그 마음을 갸륵하게 생각하여 한 푼 어치 양보다 몇 배나 되는 기름을 줬습니다. 난타(難陀)라고 하는 그 여인은 그 기름으로 등을 하나 만들어 석가에게 바쳤는데 그 수많은 등불 속에서 이상하게도 난타가 바친 등불만이 새벽까지 남아서 밝게 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처지였지만 올곧은 마음과 정성으로 임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으뜸의 빛이 되는 것’임을 가르치는 아름다운 이야기, ‘빈자일등(貧者一燈)’입니다.

마도 시인은 세상의 각박한 인심 때문에 참 많이도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그가 순수한 마음으로 이 땅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에 대해서 쓴 시, ‘미8군의 차’ 때문에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그 이후 제대로 된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그의 처지는 더욱더 그런 생각을 했을 법합니다. 1998년 그가 편운문학상을 수상할 때, 심사위원들이 정공채 시인을 다음과 같이 평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인의 시가 어떤 ‘시적 은유’로 읽혀야 하는지 마치 친절한 가이드라인을 주는 듯한 심사평이어서 이곳에 그대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정공채 시인의 시에는 삶과 현실의 표면보다 이면을 더욱 예리하게 파헤쳐 그 부조리한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 그의 이른바 ‘움직이는 시’에서 우리는 시대의 고통과 개인의 아픔을 한꺼번에 거머쥐려는 복합적인 상상력의 완숙미를 엿볼 수 있다. 비속한 세상살이에서는 비록 패배하였을망정 오만한 정신의 황제로서 독창적인 발상과 메타포의 창조를 통해 한국 문학에 새 숨결을 불어 넣었다.”

심사평에 의하면, 어쩌면 시인이 이 시에서 지칭하는 ‘빈등(貧燈)’은 비록 세상은 온통 권력과 부를 좇아 마치 불나방처럼 어지럽게 돌아 가지만, 자신은 어두운 골목길을 밝히는 ‘오만한 정신의 황제로서’ 외로운 하나의 빈등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다짐의 시 같기도 합니다.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한 잔 술에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는 속담을 슬쩍 언급하며, 자신이 그동안 평전을 썼던, 당시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던 공초 오상순 시인이나, 불꽃처럼 살다 간 전혜린 시인, 아니면 노천명 시인 등과 같은, 같은 방향으로 외로운 길을 함께 걷다가 먼저 간 동료 시인들을 ‘시적 은유’로 노래한 것은 아닐까.

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오늘 감상하는 정공채 시인의 시 속에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한 잔 술에도 눈물이 난다’는 시어를 읽으면, 공초 오상순 시인(1894~1963)의 시 ‘한 잔 술’이 생각나는 건 우연일까. 그런 면에서 이 시는 꼭 정공채 시인이 공초 오상순 시인을 생각하면서 노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자꾸 들기도 합니다.

한 잔 술

- 공초 오상순

나그네 주인이여 평안하신고,
곁에 앉힌 술 단지 그럴법 허이,
한 잔 가득 부어서 이리 보내게,
한 잔 한 잔 또 한 잔 저 달 마시자
오늘 해도 저물고 갈 길은 머네,
꿈 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이여 이거 어인 일,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도 없거니
심산유곡 옥천(玉泉) 샘에 홈을 대었나
지하 천척 수맥(水脈)에 줄기를 쳤나
바다를 말릴망정 이 술 단지사,
꿈 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이여 좋기도 허이,
수양은 말이 없고 달이 둥근데,
한 잔 한 잔 또 한 잔 채우는 마음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비우는 마음,
길가에 피는 꽃아 서러워 마라
꿈 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이여 한 잔 더 치게
한 잔 한 잔 또 한 잔
한 잔이 한 잔
한 잔 한 잔 또 한 잔 석 잔이 한 잔
아홉 잔도 또 한 잔 한 잔 한없어
한없는 잔이언만 한 잔에 차네,
꿈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이여 섧기도 허이,
속 깊은 이 한 잔을 누구와 마셔,
동해바다 다 켜도 시원치 않을
끝없는 나그넷길 한(恨) 깊은 설움,
꿈 인양 달래 보는 하염없는 잔
꿈 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 시선집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한국문학사, 1983)

초 오상순 시인은 서울의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지사 대학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한, 당시로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뛰어난 인재였지만 그 어떤 감투도, 직업도 가진 적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습니다. 또 그는 종교인은 아니었지만 불가의 스님보다 더 현실에서 해탈한 도인에 가까웠습니다. 살아생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 한 권의 책도 내지 않았고 또 재물과 지위, 아내와 자녀, 거처에 대한 욕심까지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었습니다. 공초는 한국 문학사 100여 년을 통틀어 무소유를 완벽하게 실천한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귀로(歸路)에 / 발걸음이 무거운 사람’이었던 정공채 시인, 그의 나이 서른 즈음에, 갑작스런 공초의 타계 소식을 듣고 아마도 그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이 시를 노래했을 법도 합니다.

거철이 다가 오는 요즘, 이합집산, 배신과 상호 비방이 일상화된 혼란스러운 세태를 바라보면서, 그 시절 '몹시 추운 겨울 밤중에도 / 떨면서 불 켜고 혼자 / 저립한' 빈등임을 자처하며 불꽃처럼 살다가 스러져 간 올곧은 시인들이 그리워집니다. - 석전(碩田)

정공채 시인이 쓴 공초 오상순과 전혜린 시인의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