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화학 선생님 / 그건 세 글자다 - 정양

석전碩田,제임스 2024. 3. 20. 06:00

화학 선생님

 

- 정양

 

중간고사 화학시험은

문항 50개가 전부 ○X 문제였다

선생님은 답안지를 들고 와서

수업시간에 번호순으로 채점결과를 발표하셨다

기다리지도 않은 내 차례가 됐을 때

“아니 이 녀석은 전부 X를 쳤네, 이 세상에는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제대로 채점하면 60점인데 기분 좋아서 100점”

그러시고는 다음 차례 점수를 매기셨다

모두들 선생님의 장난말인 줄로만 여겼는데

며칠 뒤에 나온 내 성적표에는 화학과목이

정말로 100점으로 적혔다 백발성성한

지금도 그 점수를 믿지 않지만

이 세상에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른 일들이

옳은 일보다 많아지는 것도

나는 아직 믿지 않을 수가 없다

 

-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모악, 2016)

 

* 감상 : 정양 시인.

1942년 1월 17일, 전북 김제읍 신풍리에서 사회운동가인 정을(鄭乙), 보통학교 교사인 노함안(魯咸安)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6.25 전쟁 중 김제 중앙초등학교, 서울 효제초등학교, 다시 김제 공덕초등학교 등을 다니며 극심한 흉년을 겪는 가난한 마을(종가가 있는 마현리 마재마을)의 배고픈 아이들과 어울려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리 남성중, 남성고를 거쳐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죽산 중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래, 이리 원광고, 전주 신흥고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원광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마치고 마지막 교직은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 2007년 정년 퇴임하였습니다.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청정을 보며’가 당선되었고,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윤동주 시 평론 ‘동심의 신화’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퇴직 후, 2016년 시인 안도현, 김용택 등 전북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 20여명과 함께 지역 출판사인 ‘모악’을 설립, 문학의 다양성과 지속성 실현을 위해 출판사를 직접 경영하고 있습니다.

 

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었던 6.25 전쟁 속에서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시인의 가족을 모티브로 삼아 윤흥길의 중편 소설 <장마>(문학과 지성사, 1973)가 씌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던 그는 같은 해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서 당선된 윤흥길 소설가와 동향, 동년배라는 인연으로 이후 ‘절친’이 되었다고 합니다.

 

집으로 <까마귀 떼>(은애, 1980), <수수깡을 씹으며>(청사, 1984), <빈집의 꿈>(푸른숲, 1993),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창비, 1997),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문학동네, 2005), <나그네는 지금도>(생각의 나무, 2006), <헛디디며 헛짚으며>(모악, 2016), <암시랑토앙케>(모악, 2023) 등이 있고, 시선집 <철들 무렵>(문학동네, 2009)이 있습니다. 산문집으로는 <아슬아슬한 꽃자리>(작가, 2022), <세월이 보이는 길>(신아출판사, 2012), <백수 광부의 꿈>(작가, 2009), <판소리 더늠의 시학>(문학동네, 2001) 등이 있습니다. 모악문학상(2001), 아름다운 작가상(2002), 백석문학상(2005), 구상문학상(2016) 등을 수상했습니다.

 

시는 시인의 시집 제1부 ‘응답하라 1950’에 다섯 번째로 소개되는 시로, 정양 시인이 자신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시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2013년부터 방영되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88’등 일명 ‘응답하라 씨리즈 드라마’의 영향을 받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날을 회상해 보면 정양 시인이 중고등학교 학생이었을 당시만 해도 이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교사들에게 이만한 재량권이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기분 좋다고 60점을 100점으로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지금 이런 일을 했다면 선생님을 고발하는 학생과 학부모들로 온 나라가 뒤숭숭할 것입니다. 수행 평가나 내신 평가 제도가 도입된 이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서로 믿지 못하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모든 걸 점수나 숫자로 평가해야 하다 보니 획일적이고 경쟁적인 교육 현장은 낭만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어느 대학의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교양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들의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선풍기를 켜 놓고 날린 후 가까이 떨어진 답안지는 A학점, 멀리 날아간 답안지는 D학점을 줬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는, 이제는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전설일 뿐입니다.

 

런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온통 점수로 학생을 평가하고 획일적인 시스템으로 통제하는 ‘지금의’ 교육 현장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지금도’ ‘그른 일들이 옳은 일보다 많다는 것 / 나는 믿지 않을 수 없다’고 노래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현실 자체입니다.

 

늘 감상했던 시 바로 앞에 있는 그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더 읽어보면, 당시 시인을 가르쳤던 화학 선생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그건 세 글자다

 

- 정양

 

왔다리갔다리 시계불알 화학선생님은

분필 하나 달랑 들고 교실에 들어선다

출석도 안 부르고 차렷 경례 끝나면 곧바로

노트도 책도 없이 고개를 한 번씩 좌우로 저으며

수업 내용을 칠판에 빼곡히 적으신다

늘 그러시는 분이라 그걸 예사로 알 뿐

그걸 감탄하는 아이들은 없다

판서가 끝나면 교실 뒤쪽 빈 공간에서

왔다리갔다리 시계불알 노릇을 하다가

아이들 노트정리가 대충 끝난다 싶으면

교단에 올라 판서 내용을 해설하시곤 했는데

그날은 왔다리갔다리를 멈추고 칠판으로 다가가서

'모든 생물은 H2O를 保持한다' 라고 적힌

保持 밑에 밑줄을 두 개나 쫙쫙 긋고

분필로 그 밑줄을 톡톡 두드리며

"여기서는 꼭 漢字로 써라" 한마디 하시고는

어깨에 내려앉은 분필가루를 좌우로 후후 불고

다시 교실 뒤쪽으로 가신다

두어 녀석의 큭큭거리는 소리를

선생님은 뚜벅거리는 발소리로 꾹꾹 죽이더니

아이들 등 뒤에 한 말씀 던지신다

"지짜로 끝나는 말은 대개 좋지 않다"

두어 군데서 큭큭거리는 소리가 다시

꾹꾹꾹꾹 죽어가는 판에 한 아이가

"아버지는요?" 하고 묻자 간발의 차이도 없이

"그건 세 글자다"라는 선생님의 단호한 말씀에

꾹꾹거리던 교실은 마침내 빵 터져버렸다

돼지 엄지 휴지 정지 거지 토지 연지 꽁지

지짜로 끝나는 두 글자 말들이 많고 많건만

'좋지 않다' 는 그 말씀에만 홀려

많고 많은 지짜로 끝나는 두 글자 말들을

아이들도 선생님도 깡그리 까먹어버린 순간이었다

아이들이 책상을 두드리거나 발을 구르거나 말거나

선생님은 교실 뒤에서 혼자 빙긋거리며

왔다리갔다리 다른 말들 다 까먹은

지짜걸음을 뚜벅거리셨다

 

-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모악, 2016)

 

시를 읽으면 유머와 익살이 넘쳤던 화학 선생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자유분방한 태도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학생들이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바람에 날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배꼽을 잡고 웃었을 정도로 낭만이 있었던 학생들이었으니, 좋아하는 선생님의 농담 섞인 말에 빵 터지도록 반응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활력이 넘치는 교실 안 전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선생님에 그 학생들’이 만들어 낸 시라고나 할까요.

 

양 시인의 시는 언뜻 보면 단순해 보이고 또 수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평범하지만 읽고 나면 그 이면에서 삶의 내공이 탄탄하게 느껴져 오는 시들이 많습니다. 그의 시집 날개에 실린 글에서 문태준 시인은 ‘정양 선생님의 시는 몸살을 앓고 난 후에 얻은 시다, 영혼이 앓아누운 자리에서 얻은 것이어서 시구(詩句) 곳곳을 따라 읽을 때 온몸이 쑤신다. 그러나 싱긋싱긋거리게 하는 익살 또한 있다. 농이 넘친다. 세상의 헛걸들에게 거는 힐난이 날카롭다. 답답하던 가슴에 펑 구멍이 뚫린다. 거참, 시원하다.’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평을 했습니다.

 

쪼록 새 학기를 맞은 학교 현장이 이런 따뜻한 정이 넘치는 명실상부한 멋진 교육의 장(場)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