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여름 끝물 / 자라 - 문성해

석전碩田,제임스 2024. 8. 7. 06:00

여름 끝물

 

- 문성해

 

여문 씨앗들을 품은 호박 옆구리가 굵어지고

매미들 날개가 너덜거리고

쌍쌍이 묶인 잠자리들이 저릿저릿 날아다닌다

 

얽은 자두를 먹던 어미는 씨앗에 이가 닿았는지 진저리 치고

알을 품은 사마귀들이 뒤뚱거리며 벽에 오른다

 

목백일홍이 붉게 타오르는 수돗가에서

끝물인 아비가 늙은 오이 한 개를 따와서 씻고 있다

 

- 시집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문학동네, 2016)

 

* 감상 : 문성해 시인.

1963년 경북 문경읍 상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1986년)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일간 신문의 신춘 문예에 작품을 제출하는 등, 수년을 노력한 끝에 1998년 매일신문 신춘 문예에서 ‘공터에서 찾다’와 2003년 경향신문 신춘 문예서 시 ‘귀로 듣는 눈’이 연거푸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문채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습니다. 등단 후 알게 된 남편인 유종인 시인과 결혼에 골인, 인천에 정착하였다가 2년 후인 2002년 일산 호수 공원 인근으로 옮겨 현재 전업 작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집으로 <자라>(창비, 2005),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랜덤하우스 코리아, 2007), <입술을 건너간 이름>(창비, 2012),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문학동네, 2016), <내가 모르는 한 사람>(문학수첩, 2020) 등이 있습니다. 2014년부터 <동시마중>에 동시를 발표해 오고 있으며, 동시집으로 <오 분만!>(상상, 2020)이 있습니다. 대구시협상(2005), 수주문학상(1999), 김달진 문학상 젊은 시인상(2007), 부산해양문학상 대상(2007), 여수해양문학상(2008), 시산맥 작품상(2015) 등을 수상했습니다.

 

늘은 절기상으로 가을이 시작된다는 입추(立秋)입니다. 제아무리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어도 절기는 절대로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연일 ‘일일 체감온도가 35도를 연이틀 계속될 때 발령한다는 폭염 경보’가 몇 주째 계속되고 있지만 이제 입추가 시작된 이상 머지않아 그 끝이 올 것입니다.

 

늘 감상하는 문성해 시인의 시는 바로 이즈음에 딱 맞는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인이 노래했듯이, 폭염이 작렬하는 무더위 때문에 힘든 날들이 계속되고 있지만 영글대로 영근 만물은 지금이 바로 ‘여름의 끝물’임을 알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끝물’이라는 말을 우리말 사전에서 찾아보면, ‘끝을 나타내는 순우리말로 1)시간, 공간, 사물 따위에서 마지막 한계가 되는 곳. 2)과일, 푸성귀, 해산물 따위에서 그해의 맨 나중에 나는 것. 3)활발하던 기세가 사그라드는 시기, 또는 그런 것. 4)행동이나 일이 있은 다음의 결과’ 등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마도 시인은 이 네 가지의 약간 다른 의미에 해당하는 ‘끝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각각의 뜻에 해당하는 것을 삶 속에서 관찰하여 찾은 예시를 그저 시의 내용으로 평범하게 써 내려간 것입니다. 안도현 시인은 그의 책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에서 문성해 시인의 이 시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멋진 시 감상문을 덧붙였습니다.

 

‘호박도 매미들도 잠자리들도 끝물이다. 얽은 자두도 자두를 먹는 어미도 사마귀도 끝물이다. 목백일홍도 아비도 늙은 오이도 다 끝물이다. 끝물 때는 모두 굵어지고 너덜거리고 저릿저릿하고 진저리 치고 뒤뚱거린다. 이 시의 매력은 만상을 그저 태연하게 제시하고 덤덤하게 그리는 화자의 태도에서 나온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읽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변화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이 적막 속에 시인이 숨겨둔 게 있다. 거의 모든 시행이 성적인 충동, 혹은 본능적인 번식의 이미지와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끝물이 아니라고 우기는 슬픔이 이 시의 배후라고 할 수 있다.’

 

도현 시인은 모든 ‘끝물’들은 그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결실이나 번식’이 반드시 그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이 시에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바로 ‘시적 은유’임을 말한 후, 이것을 ‘이 시의 배후’라는 멋진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실과 다음 세대를 위한 생명의 끝물인 ‘씨앗’이 그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찌는듯한 더위를 이겨낸 것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임을 시인은 차분한 음성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노래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는 것은 지난여름이 참으로 위대했기 때문’이라고 목청껏 노래했던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와 어쩌면 닮아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금까지 다섯 권의 시집을 펴낸 문성해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 시가 참 재미있고 감칠맛이 납니다.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는 주위의 사물을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그것을 그저 누에가 실을 뿜어 고치를 만들 듯, 자연스럽게 결대로 풀어낸 이야기들이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의 첫 시집 표제작으로 실린 시 ‘자라’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자라

 

- 문성해​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하얀 손의 그 임자

 

취한(醉漢)의 발길질에도

고개 한번 내밀지 않던

 

한 평의 컨테이너를

등껍질처럼 둘러쓴

 

깨어나보면

저 혼자 조금

호수 쪽으로 걸어나간 것 같은

 

지하철 역 앞

토큰 판매소

 

오늘 불이 나고

보았다

 

어서 고개를 내밀라 내밀라고

사방에서 뿜어대는

소방차의 물줄기 속에서

 

눈부신 듯

조심스레 기어 나오는

꼽추 여자를

 

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

자라다 만 목덜미가

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 시집 <자라>(창비, 2005)

 

평의 컨테이너를 등 껍데기처럼 둘러싼 지하철 역 앞 토큰 판매소에서 일하는 꼽추 여인을 유심히 관찰하고 노래한 것입니다. ‘한번도 만날 수 없었던/ 하얀 손의 그 임자/ 취한(醉漢)의 발길질에도/ 고개 한번 내밀지 않던,’ 그 ‘자라’ 여인은 불의의 재난을 당하고서야 ‘눈부시듯/ 조심스레 기어나’와 ‘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목덜미를 드러냈다는 것인데, 남루하고 쓸쓸한 우리 이웃들, 그저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인의 시선이 돋보이는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선뜻 다가서기가 꺼려지는 낮은 곳, 어둡고 추운 곳, 소외된 곳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그것들이 지니는 생명력을 시적 은유로 풀어내는 그녀의 시편들이 참 좋습니다.

 

성하(盛夏)의 계절에,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무사히 입추를 맞은 것을 감히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시인이 벗어 준 안경으로 주변을 보니 그 ‘여름 끝물’들이 너무도 확연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