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가는 마음에게
- 오애순
어려서는 손 붙들고 있어야
따신 줄 알았는데
이제는 곁에 없어도
당신 계신 줄을 압니다.
이제는 내게도 아랫목이 있어
당신 생각만으로도
온 마음이 데워지는걸
낮에도 달 떠있는 걸
아는 듯이 살겠습니다.
그러니 가려거든 너울너울 가세요.
50년 만에 훌훌 나를 내려두시고
아까운 당신 수고많으셨습니다.
아꼬운 당신 폭싹 속았수다.
- 드라마 속 시집 <폭싹 속았수다>(바당꽃, 2025)
* 감상 : 오늘은 특별한 시 감상,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 감상이 아니라 드라마 한 편을 감상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3월 7일 공개되어 4주간에 걸쳐 전체 16부작이 방영되면서 장안의 뜨거운 화제가 되었던 OTT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이야기입니다. 제주도의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오애순’과 ‘양관식’이라는 두 남녀 주인공, 그리고 그들의 삶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서사적으로 풀어낸 감동 성장 드라마입니다.
몇 년 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어 대박을 터뜨렸던 <오징어 게임>, 또 애플 TV에서 방영되었던 <파친코> 이후, 주변에서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 작품은 없었습니다. 최근 만나는 사람마다 <폭싹 속았수다> 이야기를 하길래 궁금해서 그동안 잘 이용하지 않아 끊어져 있던 넷플릭스를 다시 연결하고 시청했습니다. 처음 시청했던 부분이 여주인공 오애순이 어촌계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그 앞부분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앞쪽 이야기를 계속 거꾸로 시청하면서 그때부터 마지막 회까지는 매주 금요일 4부작씩 공개되는 본방을 사수하는, 눈물 찔끔찔끔 닦으며 그 시간을 기다리는 찐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주인공인 오애순과 양관식의 나이가 50년대 중반 출생으로, 그들이 살아낸 삶이 비록 공간이 다르긴 하지만 비슷했기 때문에 이야기에 쉽게 몰입되었던 듯합니다. 특히, 아름다운 제주도의 사계절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치밀한 연출, 또 배우들의 갈칠 맛 나는 명연기 덕분에 마치 내 이야기인 듯 감정이입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절묘한 1인 2역(어린 오애순 역을 아이유가 맡고, 오애순의 큰 딸 금명 역을 다시 아이유가 맡는 방식) 연출 기법은 주인공인 '내' 이야기가 곧 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우리들의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풀어내니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생겨 훨씬 더 쉽게 공감하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드라마 속에서 문학소녀로 그려진 주인공 오애순이 평생에 간직하고 있던 꿈 중의 하나인 ‘시인이 되는 것’의 결실로 출판된 첫 시집 <폭싹 속았수다>의 표제작으로 실린 시입니다. 50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 양관식이 암으로 안타깝게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 상황을 그저 비관하며 슬픔으로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이 굳세게 살아온 것처럼 담담하게 시로 승화시킨 위로의 노래입니다.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은 제주도 방언으로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평생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을 위해서 묵묵히 무쇠처럼 일만 해오다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남편에게 제주 방언으로 ‘아꼬운 당신 폭싹 속았수다’라며 진심어린 사랑과 찬사의 박수를 보내며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멋진 아름다운 풍광을 의도적으로 배경으로 하는 몇몇 외화들을 볼 때마다 우리도 저런 영화 한 편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호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아낸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케냐의 장대한 풍광과 아름다운 선율의 OST가 어울리는 <아웃오브아프리카>, 또 일부러 이탈리아의 유명 관광지 곳곳을 찾아다니며 촬영한 <Trip to Italy> 등이 언뜻 생각나는 그런 영화들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앞으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덕분에 제주의 주요 촬영지들, 가령 어린 애순이가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던 김녕 해변, 엄마를 그리며 시를 썼던 제주목 관아, 그리고 부상길이 객기를 부리며 자전거를 탔던 비양도 해안 자전거 도로, 제주의 풍광을 잘 보여주는 성산 일출봉, 오라동 메밀꽃밭 등에 관광객들이 몰려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쯤에서 드라마 속에서 어린 애순이가 읊었던 시로 소개되는 '제주'라는 제목의 시를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제주
- 오애순(어린 애순)
천만번 파도
천만번 바람에도
남아있는 돌 하나
내 가심 바당에
식지 않은 돌 하나
엄마
제주 방언으로 '바당'은 바다를 말합니다. 애순의 가슴 바다에 언제나 식지 않는 따뜻한 돌로 존재하고 있는 '엄마'는 드라마 내내 가장 큰 물줄기로 흐르는 하나의 중심 '은유'입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기뻤던 것은 '폭싹 속았수다'가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야기 속에선 주인공의 삶에서 건져 올려진 시들로 가득한 시집 제목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주인공 애순이 삶이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모든 고비를 잘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이 결국 그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꿈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꿈이 다른 게 아니라 '시'였다니 얼마나 이쁘고 근사한 발상인지요!
공개한 지 3주 차에 이미 글로벌 비영어 부문 넷플릭스 전 세계 1위, 2025년 3월 한국인이 좋아하는 방송영상 프로그램에서 6.9%의 선호도를 기록하면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기록하는 등 이 드라마는 벌써부터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미생>, <시그널>, <나의 아저씨> 등을 연출했던 김원석이 연출하였고, 극본은 임상춘(필명) 작가가 썼습니다. 덤으로, 이쁜 시를 한 편 더 읽으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추풍
- 오애순(큰 애순)
춘풍에 울던 바람
여적 소리 내 우는 걸
가만히 가심 눌러
점잖아라 달래 봐도
변하느니 달이요
마음이야 늙겠는가
아마도 이 봄이 다 가기 전, 봄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제주를 휘 한 바퀴 다녀와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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