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 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 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 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 시집 <가장 따뜻한 책>(민음사, 2005)
* 감상 : 이기철 시인. 호는 여향(如鄕).
1943년 1월 9일, 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영남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1986년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거창의 옛 지명인 ‘아림’을 기리는 <제1회 아림예술상> 한글 시 백일장 부문에서 시 ‘새’가 장원으로 뽑혔으며, 대학 2학년 때인 1963년에는 경북대학교가 주최한 <전국대학생문예작품 현상공모>에서 시 ‘여백시초’가 당선되어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김춘수 시인을 만났습니다. 1972년 문덕수 시인이 주관하고 있던 <현대문학>에 ‘5월에 들른 고향’ ‘너와 함께’ ‘향가시’ 등의 시가 추천 완료됨으로써 등단하였습니다.
이후 첫 시집 <낱말추적>(중외출판사, 1972)를 시작으로, <청산행>(민음사, 1982), <전쟁과 평화>(문학과지성, 1985), <우수의 이불을 덮고>(민음사, 1988), <내 사랑은 해지는 영토에>(문학과비평사, 1989), <시민일기>(장시집)(우리문학사, 1991),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문학과지성사, 1993), <열하를 향하여>(민음사, 1995), <유리의 나날>(문학과지성, 1998),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민음사, 2000), <스무살에게>(수밀원, 2004), <가장 따뜻한 책>(민음사, 2005), <정오의 순례>(애지, 2006),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서정시학사, 2008), <잎, 잎, 잎>(서정시학사, 2012), <나무, 나의 모국어>(민음사, 2012), <별까지는 가야한다>(육필시집)(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흰 꽃 만지는 시간>(민음사, 2017), <우리 집으로 건너온 장미꽃처럼>(시가 이렇게 왔습니다)>(문학사상, 2021.11) 등의 시집을 냈고, 에세이집 <손수건에 싼 편지>(모아드림, 1999),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문학동네, 2005), <영국문학의 숲을 거닐다 - 동서양의 베를 짜다>(기행 에세이집)(푸른사상사, 2011), 비평서로 <시를 찾아서>(심상사, 1990), <인간주의 비평을 위하여>(문학과지성사, 1998), 그리고 소설집 <땅 위의 날들>(자전소설)(민음사, 1994), 학술서로 <시학>(일지사, 1989), <분단기 문학사의 시각>(우리문학사, 1991) 등을 냈습니다. 대구 시인협회장과 한국어문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김수영문학상(1993), 후광문학상(1993), 시와시학상(2000), 대구광역시문화상 문학 부문(2002) 등을 수상했습니다.
1978년 포항전문대학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1980년 마산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81년 김춘수 시인이 영남대학교를 그만두면서 그 후임으로 자리를 옮겨 2008년 2월 정년 퇴임 때까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현재 그 대학의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2003년 청도군 각북면 덕촌리에 자신의 호를 딴 [여향예원]을 짓고 ‘시 가꾸는 마을’을 운영하며 여전히 시작 활동과 시를 사랑하는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기철 시인의 시는 그동안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에서 몇 편을 감상한 적( 그렇게 하겠습니다 / 작은 이름 하나라도 - 이기철, 좋은 날이 오면 - 이기철 )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벚꽃이 만발한 계절에 딱 맞는 시 한 편을 읽으며 그의 시를 또 꺼내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여의도 윤중로 벚꽃이 만발했다는 소식, 또 멀리 김천 연화지의 벚꽃도 좋다면서 사진을 보내 준 지인이 계시고, 남산 둘레길에 있는 벚꽃들도 이제 막 피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야말로 벚꽃의 계절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만발한 벚꽃 나무 아래 화사한 꽃 대궐 아래에서 떠올린 시상(詩想)을 시인이 한 편의 시로 건져 올린 것입니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만발한 벚꽃 그늘 아래 앉아보길 권합니다. 그리고 그냥 앉아 있지 말고, 생의 모든 시름과 근심, 온갖 치장과 권위를 벗어놓고 앉아 있어 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그리고 ‘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 구름처럼 하이얗게’ 벛꽃 그늘에 앉아보라고 권합니다. 시인은 속삭입니다.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 저당 잡힌 내일이 /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 알게 될 것’이라고. 아니 그저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질’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 벚꽃 그늘’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랍니다.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 우리 삶 /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라고 절창을 하니 지금 당장이라도 벚꽃 그늘 아래로 달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엊그제 월요일, 경기도 광탄에 있는 마장 호수 주변 벚꽃이 생각이 나서 소심이를 데리고 한달음에 달려 갔지만 전혀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은 상태를 확인하고, 막 연두색 잎을 틔우고 있는 호수 주변의 버드나무들만 실컷 구경하고 실망스럽게 제자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살고 있는 은평 뉴타운 폭포동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니 아침나절에는 꽃이 필 조짐도 보이지 않았던 벚꽃들이 하나둘 피기 시작했더군요. ‘벚꽃 구경을 위해 굳이 멀리 가지 말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자기를 조금만 기다리면 될 일을 어찌 그리도 헛걸음하셨느냐’고 섭섭하게 말을 건네는 듯했습니다. 아마도 이곳의 벚꽃은 오늘과 내일 중으로 활짝 필 것 같습니다.
화사한 벚꽃 그늘 아래에서 묵직한 삶의 화두를 던지는 시인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읽어보겠습니다. 그저 제목만 들어도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시입니다.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 이기철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그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 막힘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잔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 소릴 낸 적 있었던가
고통이 언제 뼈를 드러낸 적 있었던가
목조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를 패망시키지는 못한다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매질은 따가울수록 생을 단련시키는 채찍이 된다
이것은 결코 수식이 아니니
고통이 끼니라고 말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누군들 근심의 힘으로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을 딛고 생을 건너간다
아무도 보료 위에 누워 위기를 말하지 말라
위기의 삶만이 꽃피는 삶이므로
- 시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민음사, 2000)
시인은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는 그저 편안한 날만 있어서는 불가능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 날을 단련 받고 매 맞고 또 고통과 근심의 밥을 먹는 위기의 순간이 있어야 꽃피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했던, 아니 앞으로 살아내야 할 삶 자체가 ‘위기의 연속’이지만 그 위기의 순간이 있어야 꽃피는 삶이 될 수 있다고 시인은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만발한 화사한 벚꽃 그늘 아래서 모든 걸 벗어 놓고 가만히 앉아보자고 권하는 시어들은 결코 ‘수식’하는 말이 아니라,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따가운 채찍의 매질을 견뎌낸 삶의 정수가 녹아 있는 표현들임에 분명합니다.
유난히 더디 왔던 이 봄, 그리고 이 봄을 대표하는 만개한 화사한 벚꽃을 시인이 대했던 꼭 같은 마음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벚꽃 그늘 아래 서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벚꽃을 스친 바람의 넉넉하고 싱싱한 노래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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