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좋은 날이 오면 - 이기철

석전碩田,제임스 2022. 3. 9. 06:50

좋은 날이 오면

- 이기철 
 
좋은 날이 오면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 쓰리라
바라보기도 눈부신 좋은 날이 마침내 오기만 하면
네 맘 내 맘 모두 출렁이는 강물이 되는
기쁜 서정시 한 편 쓰고야 말리라
그때가 되면, 끝없는 회의의 글을 읽고
번민의 숟가락 들지 않아도 되리라
돌 별 하늘 꽃나무만 노래해도 되리라
피 노호 상처 고통을 맑은 물에 헹궈
얼굴 맑은 누이 이름처럼 불러도 되리라
금빛 날을 짜서 만든 찬란한 한낮처럼
오래 가는 메아리처럼, 즐거운 추억처럼
루비 호박 에메랄드 사파이어처럼
잠을 밀어내는 젊은 날의 약속처럼
아, 좋은 날이 오면 잊었던 노래 한 구절
들 가운데서 불러 보리라
이름 부르기조차 설레는 좋은 날이
대문과 지붕 위에 빛으로 덮이기만 하면.

- 詩選集, <청산행>(민음사, 1982)
- 시집 < 내 사랑은 해 지는 영토에>(문학과비평사, 1989)

* 감상 : 이기철 시인.

1943년 1월, 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영남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1986년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거창의 옛 지명인 ‘아림’을 기리는 <제1회 아림예술상>에서 한글 시 백일장 부문에서 시 ‘새’가 장원으로 뽑혔으며, 대학 2학년 때인 1963년에는 경북대학교가 주최한 <전국대학생문예작품 현상공모>에서 시 ‘여백시초’가 당선되어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김춘수 시인을 만났습니다. 1972년 문덕수 시인이 주관하고 있던 <현대문학>에 ‘5월에 들른 고향’ ‘너와 함께’ ‘향가시’ 등의 시가 추천 완료됨으로써 등단하였습니다. 이후 첫 시집 <낱말추적>(중외출판사, 1972)를 시작으로, <청산행>(민음사, 1982), <전쟁과 평화>(문학과지성, 1985), <우수의 이불을 덮고>(민음사, 1988), <내 사랑은 해지는 영토에>(문학과비평사, 1989), <시민일기>(장시집)(우리문학사, 1991),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문학과지성사, 1993), <열하를 향하여>(민음사, 1995), <유리의 나날>(문학과지성, 1998),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민음사, 2000), <스무살에게>(수밀원, 2004), <가장 따뜻한 책>(민음사, 2005), <정오의 순례>(애지, 2006),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서정시학사, 2008), <잎, 잎, 잎>(서정시학사, 2012), <나무, 나의 모국어>(민음사, 2012), <별까지는 가야한다>(육필시집)(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흰 꽃 만지는 시간>(민음사, 2017), <우리 집으로 건너온 장미꽃러럼>(시가 이렇게 왔습니다)>(문학사상, 2021.11) 등의 시집을 냈고, 에세이집 <손수건에 싼 편지>(모아드림, 1999),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문학동네, 2005), <영국문학의 숲을 거닐다—동서양의 베를 짜다>(기행 에세이집)(푸른사상사, 2011), 비평서로 <시를 찾아서>(심상사, 1990), <인간주의 비평을 위하여>(문학과지성사, 1998), 그리고 소설집 <땅 위의 날들>(자전소설)(민음사, 1994), 학술서로 <시학>, <분단기 문학사의 시각> 등을 냈습니다. 대구 시인협회장과 한국어문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김수영문학상(1993), 후광문학상(1993), 시와시학상(2000), 대구광역시문화상 문학 부문(2002) 등을 수상했습니다. 1978년 포항전문대학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1980년 마산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81년 김춘수 시인이 영남대학교를 그만두면서 그 후임으로 자리를 옮겨 2008년 2월 정년퇴임 때까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현재 그 대학의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2003년 청도군 각북면 덕촌리에 [여향예원]을 세우고 ‘시 가꾸는 마을’을 운영하며 여전히 시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인이 나열한 ‘좋은 날’은 참으로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그가 마지막 구절에서 노래한 것처럼 ‘이름 부르기조차 설레는 좋은 날은’ 바로 대문과 지붕 위에 환하게 비치는 ‘눈부신’ ‘빛’에 귀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이 그토록 애절하게 노래한 ‘그 빛’은 도대체 무엇일까. ‘끝없는 회의의 글을 읽고 / 번민의 숟가락 들지 않아도 되리라 /돌 별 하늘 꽃나무만 노래해도 되리라 / 피 노호 상처 고통을 맑은 물에 헹궈 / 얼굴 맑은 누이 이름처럼 불러도 되리라’고 표현했듯이 좋은 날들이 모두 눈부시게 환한 빛의 이미지와 서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빛나는 이미지는 이 대목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금빛 날을 짜서 만든 찬란한 한낮처럼 / 오래 가는 메아리처럼, 즐거운 추억처럼 / 루비 호박 에메랄드 사파이어처럼 / 잠을 밀어내는 젊은 날의 약속처럼’ 그런 좋은 날이 오면 시인은 아름다운 서정시로 지어진 ‘잊었던 노래 한 구절’을 들판 한 가운데서 목놓아 부르겠노라고 다짐합니다.

인을 소개하는 긴 약력 내용을 보면, 그 쓴 글과 시로 엮어진 책이 부지기수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필시 시인에게 그 ‘좋은 날’이 이미 왔다는 증표가 될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주옥같은 ‘기쁨의 서정시’가 이리도 많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통령 선거가 있는 날 아침입니다. 역사적인 날 아침에 꺼내 읽는 한 편의 시로서 이 시가 적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에게 오늘이 바로 시인이 노래한 그런 ‘좋은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선거운동 기간, 여야가 극단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대치했던 상황은 다 내려놓고, 이제는 모두가 ‘네 맘 내 맘 모두 출렁이는 강물이 되는’ 겸허한 마음으로 모든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서 있는 이 ‘들판’이 화합의 빛으로 가득 넘쳐나는 눈부시게 좋은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