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봄밤 - 김수영

석전碩田,제임스 2022. 3. 23. 06:22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며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김수영 전집 1 詩>, (민음사, 이영준 엮음, 2018)

* 감상 : 김수영 시인.

1921년 11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68년 6월 향년 46 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비판의식과 저항정신으로 시적 탐구를 했던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몰락해 가는 집안 형편으로 인해 순탄치 않은 삶과 맞딱뜨립니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하여 유학을 떠났지만 학업을 다 끝마치지 못하고 연극과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징집을 피해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했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한 후 본격적 시 쓰기를 하였습니다. 특히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학년에 편입하여 잠시 수학을 하였지만 이것도 중도에 포기하고 맙니다.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 김경린, 박인환등과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내 놓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후 1950년 6.25 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서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었으나 탈출하여 서울에 내려오는데 성공했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한 국군이 패잔병 추적을 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다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압송되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거의 3년을 지내다가 가까스로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되어 석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를 시인으로서, 그리고 문학인으로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냈지만 1968년 6월 15일 문우들과 가졌던 술자리에서 귀가하던 중 과속 버스에 치여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던 중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절명하였습니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1960년대 참여파 시인들의 제일 선두에 서서 역할을 했던 그를 ‘어두운 격변의 시대의 위대한 산 증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시인이 살아 온 삶의 여정들과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봄'이란, 뭔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 같은 희망임과 동시에, 또 다른 삶의 질곡으로 빠지고 마는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봄날에 느끼는 상념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내린 결론은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 당황하지 말고, 담담하게 존재하라는, 그리고 견디면 다 지날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 그 불빛은 이내 사라지고 형체도 없이 소멸해버리는 존재입니다. 그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계속해서 읊조립니다.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 오오 봄이여’라고. 이 아름다운 봄밤에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술에 취했다가 깬 시인은 무거운 몸과 함께 조급함을 느꼈나 봅니다. 아니, 이제 그토록 매서웠던 겨울이 지나고 사방천지 봄 기운이 돌면서, 온통 꽃 소식이 들리고 있어 급히 밖을 나가고 싶던 바로 그 순간, 이제는 제발 조금 느슨해 진 마음으로 조급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이 봄’을 만끽하자고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다짐입니다. 시인은 화사한 봄을 맞기 위해 당장이라도 달려나가고 싶지만, 이제는 애써 참아 보자고 스스로에게 애틋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겁게 짓누르는 현실 상황에 골몰하여 자기 몸을 무겁게 하고 또 살아가는 ’현재‘를 온통 빼앗겨 버린다면,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사는 어리석은 모습일 뿐이라는 게 시인의 생각입니다.

그제 슬픈 소식을 접했습니다. 지난 12월 14일, 그러니까 정확하게 3개월 전부터, 보내드리는 아침 묵상 글을 전혀 열어보지 못하던 지인 한 분이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절명하셨다는 문자를 그 분의 자녀로부터 받았습니다.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아멘’으로 제가 보내는 묵상 글에 화답하셨던 분이었는데 수술하는 날 새벽 보내주신 마지막 문자가 결국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된 셈입니다. 이제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봄인데 뭐가 그리도 급해서 황망히 떠났을까요. 시인의 말처럼 ‘결코 서둘지’ 않아도 될 일인데 말입니다.

‘오늘이 뇌 수술하는 날이라 낮 4시40분에 1시간30분 정도 진행된다고 해요. 긴 시간이지만 다들 정성으로 대해주셔서 감사해요. 목사님과 어머니, 형제들은 계속 기도하시고, 지금 준비는 다 했고, 아가들이 수술 뒷바라지 하기위한 준비도 끝났고..... 감사한 과정이예요. 사랑이 넘치는 이웃과 형제애를 느껴요. 계속 사랑이 싹텄으면 좋겠어요. ^^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ㅎㅎㅎ’

로나19가 정점을 찍고 서서히 감소 추세로 돌아서면서 바야흐로 본격적인 봄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유난히 심란했던 지난 2년간의 시간들이어서 그런지 올 봄은 더욱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치 봄을 맞으러 서둘러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사명감마저 들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오늘 이 시를 감상하면서, 김수영 시인이 던지는 음성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서둘지 말라 /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 절제여 /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