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석전碩田,제임스 2022. 4. 6. 06:42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 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시선집, <그대 앞에 봄이 있다>(문학세계사, 2017)

* 감상 : 김종해 시인.

1941년 7월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63년 <자유문학> 신인상에 시 ‘저녁’이 당선되었고,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서 시 ‘내란’이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습니다. [정음사] [심상] 등의 편집에 참여하며 전문 출판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정진규, 이승훈, 오세영 등과 더불어 우리 나라 시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현대시’ 동인으로도 참여했습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이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발기위원,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현재는 도서출판 <문학세계사>의 대표이사 겸 주간을 맡고 있습니다.

종해 시인은 201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친동생 김종철 시인과 함께 문단의 대표적 ‘형제 시인’으로 유명합니다. 김종해 시인의 작품은 서민들의 생활을 형상화하면서도 강한 현실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두 아들도 문학인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시협상, 공초문학상, 펜(PEN)문학상 등을 받았고, 보관 문화훈장을 수훈했습니다.

집으로 <인간의 악기(樂惡)>(1966), <신의 열쇠>, <왜 아니 오시나요>(문학예술사, 1979), <천노, 일어서다>(장편서사시)(1977), <항해일지>(문학세계사, 1984),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문학세계사, 1990), <별똥별>(문학세계사, 1994), <풀>(문학세계사, 2001), <봄꿈을 꾸며>(문학세계사, 2010), <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문학세계사, 2013), <모두 허공이야>(북레시피, 2016), <늦저녁의 버스킹>(문학세계사, 2021)등과 詩選集으로 <무인도를 위하여>(미래사, 1991), <누구에게나 봄날은 온다>(활판인쇄시집, 시월, 2008), <우리들의 우산>(시인생각, 2012), <그대 앞에 봄이 있다>(문학세계사, 2021), <어머니, 우리 어머니>(김종해·김종철 형제 시집)(문학수첩, 2005) 등이 있습니다.

는 지금 부산에서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청명한식을 맞아 고향인 경북 성주에 있는 선영을 찾아 성묘하고, 내친 김에 친구들과 봄꽃을 보기 위해서 부산까지 달려 내려왔습니다. 역시 봄은 봄인가 봅니다. 온 천지가 울긋불긋 꽃 대궐을 이루고 있는 남녘 부산의 봄 풍경이 일품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부산 출신 시인이 쓴 봄 시입니다. 그러나 제목에는 ‘봄’이 있지만 정작 시 안에는 ‘봄’이라는 단어가 한 글자도 없습니다. 봄과 봄꽃을 노래하는 다른 봄 시와는 달리, 이 시의 맛은 그리 요란하게 봄과 봄꽃에 대해서 직접적인 묘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시보다 훈훈한 봄 바닷바람에 실려 화사하게 피어 날 봄꽃을 맞는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져 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봄이 되면 화사한 꽃 잔치를 벌이는 주변의 모습보다는, 상처받으면서도 겨울의 추위를 무사히 지나 온 인생과 삶이 먼저 생각나곤 했나 봅니다. 그래서 따스한 봄을 맞으며 평생 인생의 반려자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온 사람의 귀에 그동안 상처입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 위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는 말을 꼭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 시를 마치 <항해일지> 쓰듯 써 온 부산 출신 시인답게, 시 속에는 ‘파도’가 있고, ‘바람’이 있으며, ‘닻’이 있고 ‘밀물과 썰물’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 시는 바다와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읽을 때 더 다가오는 게 확실합니다.

시에서는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시적 은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날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한두 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반사였다고 노래하는 시인은, 우리가 사랑하는 일에도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날에는 그 파도에 맞서 싸우기 보다는, ‘조용히 닻을 내리고 / 오늘 일을 잠시라도 /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고, 또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이제 곧 피어날 화사한 꽃들이 봄의 주인공이듯, 추운 겨울 다 지내고 이제 곧 다가올 봄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즘 애플 TV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파친코>가 장안의 화제입니다. 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하여 드라마로 만든 것인데, 세계적인 기업이 천 억원씩이나 투자할만큼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입니다. 작가 이민진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1976년 부모를 따라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간 미국 이민 1.5세대입니다. 예일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할 때 일본에서 돌아 온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일본에 사는 ‘재일교포’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파친코'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기업의 변호사가 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지사 발령을 받은 변호사였던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4년 동안 생활하면서 오래전 구상했던 파친코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 치하, 고국인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살아야 했고, 또 그 후세들은 현재 미국에 사는, 슬픈 가족사를 4대에 걸쳐 장장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 배경을 총망라하여 장편으로 그려낸 소설이 바로 <파친코>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인 ‘선자’ 가족이 처음 부산에 살았던 동네가 바로 ‘영도’였습니다.

산 '영도'와 남포동을 잇는 다리는 1934년 11월 준공 당시에는 ‘부산대교’라고 불렸습니다. 다리가 준공되기 전 영도와 남포동을 오갔던 똑딱선, 그리고 남포동 어시장(현재 자갈치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관광 명소가 됨) 이야기를 시작으로 소설은 시작이 됩니다. 구한(舊韓) 말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영도에서 하숙업을 했던 선자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고명딸을 키운 그들 가족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어져 갑니다.

늘 시를 읽으면서 파친코에 등장하는 선자 가족 이야기가 갑자기 오버랩 되어 생각나는 건 왜일까요. 수많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 온 그들 이야기, 그리고 이제 그 때 그 사람들은 다 지나가고 없어졌지만 이 땅에 흐드러지게 피고 있는 봄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창입니다. 그들 대신 오늘을 사는 나만 이 아름다운 ‘그 봄’을 만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미안함 마음이 앞서는 것 또 왜일까요. 2박 3일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부산의 봄을 맘껏 눈과 가슴에 안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리고 시인의 마음으로 이렇게 노래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여, ‘상처 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추운 겨울 다 지내고 /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라고. - 석전(碩田)

부산 해운대, 그랜드조선호텔 4층 가나갤러리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이강욱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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