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섬광(Sudden Light) -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석전碩田,제임스 2022. 3. 30. 06:16

섬광

-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예전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언제 어떻게 인지는 알 수 없지요.
문 뒤편에 있는 그 풀밭을 알고 있어요,
달콤하게 코를 찌르는 향기, 한숨 소리와 바닷가를 비추던 그 불빛들도.

예전에 당신은 제 사람이었어요.
얼마나 오래 전인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제비가 날아오르던 그 순간
당신은 그렇게 고개를 돌렸고
베일이 벗겨졌지요, 난 예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어요.

예전에도 이랬었나요?
이렇듯 소용돌이치는 시간의 흐름이
우리의 삶, 우리의 사랑과 더불어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다시 회복되고
밤낮으로 다시 한번 기쁨을 주지는 않을까요?

Sudden Light

- Dante Gabriel Rossetti

I have been here before,
But when or how I cannot tell:
I know the grass beyond the door,
The sweet keen smell,
The sighing sound, the lights around the shore.

You have been mine before,
How long ago I may not know:
But just when at that swallow’s soar
Your neck turned so,
Some veil did fall, - I knew it all of yore.

Has this been thus before?
And shall not thus time’s eddying flight
Still with our lives our love restore
In death’s despite,
And day and night yield one delight once more?

- 세계문학 영미문학 시선집, <축복받은 처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시선>(글과글사이, 김천봉 역, 2017)

* 감상 :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

1828년 5월 12일,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시인이자 교수였던 아버지와 <뱀파이어>(1819)의 작가 존 폴리도리를 오빠로 둔 어머니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로제티는 본명이 가브리엘 찰스 단테 로제티였는데,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단테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이름의 순서를 바꿔서 ‘단테’를 맨 앞에 표기하였다고 합니다.

제티의 아내였던 엘리자베스 시달이 자살한 후, 그는 깊은 슬픔에 젖은 나머지 자신의 작은 일기장 -그의 많은 시들이 적혀 있는 공책 - 을 아내의 풍성한 머리칼 사이에 넣어 유해(遺骸)와 함께 묻어주었습니다. 한 악명 높은 미술상의 집요한 설득으로 로제티는 그 일기장에 적어 놓았던 시들과 새로 쓴 시들을 함께 엮어서 1870년에 <시 모음>(Poems)을 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에로틱하고 관능적인 표현들이 혹독하게 비판을 받게 되고 그는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고 한동안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마약과 위스키에 절어 살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집을 내려고 아내의 무덤까지 판 일은 그의 가슴과 뇌리에 큰 죄책감으로 깊이 각인되어 두고두고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말년에 접어들면서 시 창작에 몰두한 로제티는 “소네트는 한 순간의 기념비”라고 규정한 소네트 연작시집 <삶의 집>(The House of Life, 1870 -1878)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후 한 친구의 집에서 마약중독, 불면증에 시달리며 오락가락하는 정신으로 말년을 보냈다는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그의 아내 시달이 수면제를 과다하게 복용하고 의식불명으로 세상을 떠났듯이, 그 또한 수면제를 과다하게 복용하고 잠들었다가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엊그제 참으로 오랜만에 찾은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감상했던 영화 속에서 만났던 시입니다. 영화의 제목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원제는 [Hope Gap]인데, 우리 말 제목은 조금 길게 붙였습니다. 원제가 암시하듯이 ‘바라는 바(Hope)’가 서로 달라 그 사이에 틈(Gap)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실, ‘호프 갭’은 주인공 가족이 예전에 자주 찾곤 했던 그림 같은 해안 절벽이 있는 곳의 지명(地名)입니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시놉시스(Synopsis)를 접하고, ‘시를 좋아해서 매일 시를 읽고 정리하는 주인공’, 그리고 ‘결혼 29주년을 맞는 부부가 어느 날 중대한 이별을 선언하면서 그동안 사랑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된다’는 표현을 읽자마자 영화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왜냐하면 올해로 결혼 33주년을 맞았고 또 시를 매 주 한 편씩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요즈음의 나와 어쩌면 이렇게도 상황이 비슷할까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그런 긴 세월을 함께 살았던 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서로 결별해야만 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영화 속에서, 오늘 감상하는 바로 이 시가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화는 그림같이 펼쳐진 영국 남부 호프 갭 바닷가 절벽 위에서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남자들 사이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한 아일랜드 비행사의 죽음 예견’(An Irish Airman Foresees His Death)이라는 시를 읆으며 거닐 고 있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중요한 장면에 어울리는 명품 시들이 한 편씩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세계대전 기념비에 새겨지기도 한 의미 있는 헌시인 로렌스 비니언의 ‘전사자들을 위한 헌시’(For the Fallen)가 있는가 하면, 오늘 소개하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섬광(Sudden Light)’에 등장하는 한 구절을 마치 ‘복선(伏線)’처럼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아내 ‘그레이스’가 그동안 감상했던 시들을 골라 ‘시선집(詩選集)’으로 출판한다면 책의 제목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는 질문에, 바로 이 시의 첫째 소절인 ‘I Have Been Here Before’(예전에 이곳에 와 본적이 있어요)로 하겠다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시는 잊혀졌던 ‘사랑의 데자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사랑을 회상하면서 다시 한번 추억을 현실 속에 그려내고 싶어한다고나 할까요. 단테를 숭배할 정도로 좋아했던 로제티는 13세기의 시인 단테와 신곡에 등장하는 그의 연인 베아트리체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이 시에서 데자뷰처럼 그려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 단지 두 번 밖에 본 일이 없는 여인을 사랑했던 단테는 그녀를 ‘신곡’ 속에 되살려 천국을 안내하게 했습니다.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베아트리체는 시인의 펜 끝에서 살아나 영원한 사랑의 화신이 되었으니까요.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은 섬광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법입니다. 그 모습과 향기와 소리들 모두가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같은 ‘사랑(Love)’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사람마다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 개념과 표현 방법이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은 다 다른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고 원하는 모든 것에 응대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두 부부가 처음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서로 잘못 이해한데서부터 출발하여 서로 사랑한다고 착각한 채 29년을 살아오다가, 결국 그 틈(Gap)을 좁히지 못해 불행한 결말을 맺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학도 좋고 시도 좋고, 또 자기만을 위한 공간과 시간도 다 좋지만, 정작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게 진정한 사랑일까. 내면에 있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겉도는 대화를 계속해 나간다면 결국 그 틈새는 자꾸 자꾸 벌어지게 마련일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는 장면에서, 아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보내는 형식의 편지 글이 마치 시처럼 뭉클하게 들려오는 건 왜일까. 아마도 유명한 시인의 시는 아니지만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는 글이기 때문이 아닐까.

화 속에서 소개되는 몇몇 장면들을 보면서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는 질문들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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