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벚꽃 - 이윤학

석전碩田,제임스 2022. 4. 13. 06:30

벚꽃

- 이윤학

벚꽃 피기 전에
저 많은 분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저 분들 중에
벚꽃이 피기만을 기다린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

벚꽃이 피기 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몰려오기만을
누가 기다리기나 했을까

그래도 올 때는 좀 나았겠지요
이쯤 되면 짜증만 앞서겠지요
앞이나 끝이나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겠지요

여기서 주저앉아
살 분은 없을 겁니다

- 시집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8)

* 감상 : 이윤학 시인.

196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청소부’, ‘달팽이의 꿈’ 등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먼지의 집>(문학과지성사, 1992),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문학과지성사, 1995),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문학동네, 1997),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문학과지성사, 2000),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문학과지성사, 2003), <그림자를 마신다>(문학과지성사, 2005),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문학과지성사, 2008), <나를 울렸다>(문학과지정사, 2011),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간드레, 2021)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졸망 제비꽃>(황금부엉이, 2005), 장편동화 <왕따>(문학과지성사, 2006), <샘 괴롭히기 프로젝트>(문학과지성사, 2009), <나 엄마 딸 맞아>(새움, 2012), 그리고 산문집 <거울을 둘러싼 슬픔>(문학동네, 2000), <불행보다 먼저 일어나는 아침>(문학의전당, 2012)이 있습니다. 김수영문학상, 동국문학상, 불교문예작품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꽃에 대한 나의 추억은 어릴 적 어김없이 소풍을 가곤 했던 ‘양정 벚꽃’입니다. 경북 성주 가천면에서 수륜면으로 가는 길, 약 2~3Km 신작로 양쪽 가로수는 온통 벚꽃 나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벚꽃으로 유명한 경남 진해 다음으로는 ‘양정의 벚꽃’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세를 타서 벚꽃이 필 시기에는 상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몇날 며칠을 기다려 드디어 소풍을 가는 날, 평소 만져보지도 못했던 10원짜리 지폐 한 장, 그리고 특별한 반찬을 담은 맛난 도시락과 사이다 한 병을 가방에 넣고 양정까지 전교생이 걸어가는 풍경은 벚꽃 못지않게 장관이었지요. 넓은 시냇가에서 보물찾기, 수건돌리기, 닭다리 싸움 등 재미난 게임을 하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던 봄 소풍의 기억은, 결국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봄꽃을 기다리는 병’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쉽게도 그 멋진 ‘양정의 벚꽃 길’은 몇 년 전 고속화 도로가 완공되면서 이제 영원히 추억 속에만 있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난 주, 청명한식을 맞아 고향 선영에 들러 잠시 성묘를 한 후 봄꽃을 기다리는 병을 달래기 위해 남녘으로 내달렸습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진해 벚꽃 축제는 엄두를 내지 못했고, 부산에 사는 고향 친구들을 만나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 못한 그간의 회포도 풀고 또 봄꽃 흐드러지게 핀 남녘 바닷가를 산책하기로 의기투합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릴적 추억을 소환해 내는 해운대 달맞이 길에 핀 벚꽃의 화사함을 만끽하고 돌아오니, 그새 서울의 벚꽃도 뒤질 새라 활짝 만개하였더군요.

늘 감상하는 시는 벚꽃으로 유명해서 활짝 핀 벚꽃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을 갔다가 느낀 감정을 표현한 시입니다. 그 곳이 진해 벚꽃 축제일수도 있고, 아니면 여의도 윤중로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기야 이제는 가는 곳마다 벚꽃으로 유명한 지역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벚꽃 길, 경주 왕릉 벚꽃 길, 내장사나 내소사의 벚꽃 터널, 대구 팔공산의 벚꽃길, 서울 석촌 호수의 벚꽃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중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곳도 벚꽃이 보기 좋은데 왜 언급하지 않는지 섭섭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시의 마지막 연이 사실 이 시를 한 편의 평범하지 않은 시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듯합니다. ‘여기서 주저앉아 / 살 분은 없을 겁니다’라는 이 말은, 그렇게도 화사하고 아름답던 벚꽃도 피는가 싶더니 금새 지고 만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과 며칠 반짝 별유천지를 만드는 벚꽃이 화려하고 이쁘긴 하지만, 이곳에 주저앉아 살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시인은 단정합니다.

꽃 중에서도 사람들이 유난히 벚꽃을 찾아 몰려드는 것은, 그 화사한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그보다는 어쩌면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사람과 장소’에 대한 애틋한 추억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제가 유년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양정의 벚꽃’ 때문에 이맘때만 되면 병이 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해서 오늘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비로 인해 올해 벚꽃도 그저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벚꽃이 바람에 지는 것을 보며 지독한 그리움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애틋하게 노래한 ‘벚꽃 엔딩’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라고 애타게 그리운 사랑을 부르며 시작한 노래가 결국, 벚꽃 그 자체보다는 ‘사랑하는 그대와 단둘이 손잡고 / 알 수 없는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라며 추억 하나를 만든 것이 더 소중하다고 노래합니다.

꽃이 다 지기 전에 오래 기억될만한 추억 만들기 하나 만들어 보시는 건 어떤지요.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