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 황지우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內藏寺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1998)
* 감상 : 황지우 시인.
1952년 1월, 전남 해남군 북일면 신월리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 1972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73년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었고 1980년 에는 5.18 민주화운동 가담으로 구속되었습니다. 1979년 2월, 서울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그는 구속 전력 때문에 대학원에서 제적당하기도 했습니다. 경찰에서 고문 끝에 풀려난 뒤 1981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1985년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1994년부터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97년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자리를 옮겼으며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한.예.종의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8년 8월 정년퇴임했습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연혁'이 입선하였고, 시집 <나는 너다>이 시문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내용으로 한 때 논란이 되었으나 이것은 승려로 있던 형(혜당 스님, 속명은 황승우)과 철학자이자 노동 운동가였던 동생 황광우에게 주는 헌시(獻詩)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시집으로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문학과지성사, 1983),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나는 너다>(풀빛, 1987/ 개정판: 문학과지성사, 2015), <게 눈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조각 시집/ 학고재, 1995),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1998) 등이 있고, 희곡집 <오월의 신부>(문학과지성사, 2000)가 있습니다.
한국 해체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인으로 도표나 특수 문자, 그림들을 도입해 혁신적인 시작법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후기로 갈수록 연극에 관심이 많아져 연극적인 요소들이 강해지는 편이고, 가족 이력 때문인지 불교적인 색채도 있는 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군부 독재 시절 한국의 암울함을 풍자하거나 저항하는 내용들이 많으나, 서정시도 자기 식으로 구사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친구인 이성복 시인과 더불어 1990년대 젊은 시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1983년 김수영문학상, 1991년 현대문학상, 1993년 소월시문학상, 1999년 백석문학상과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갑자기 화사하게 피는 봄꽃, 그 중에서도 이팝나무와 벚꽃을 보면서 인생의 찰나 같은 순간을 역설적으로 노래한 시입니다. 시인은 벚꽃과 이팝나무가 마치 팝콘이 뻥 터지듯이 튀밥 튀기듯 갑자기 피어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어쩌다 한순간 /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이라고, 그리고 그런 날에는 ‘잠시 세상 그만두고 /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라고 능청을 떨면서 낙천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시를 있는 그대로 감상하면 벚꽃이며 이팝나무 흐드러지게 피는 좋은 계절에, 마치 소풍 즐기듯이 한바탕 휴가 즐기듯 놀아보자고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곱씹어 보면서 한 번 더 읽어보면 우리가 사는 삶이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일 뿐임을 노래하는 시적은유가 느껴지는 시입니다.
일찍이 시인은,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中古品’(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다> 속에 수록된 시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이라고 노래 한 적이 있습니다. 손만 대면 중고품인 주제에 그토록 죽도록 아웅다웅하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였지요. 우리 삶이란 세월 속에서 신품 기계가 중고품이 되었다가 결국 고장이 나고 낡아서 쓰레기가 되어 가는데, 그 찰나의 순간이 마치 벚꽃이 한 순간 피었다가 금방 져버리는 것처럼 ‘눈감으면, 꽃잎 대신 /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일 뿐인데 인간은 참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요'라고 마무리 짓는 시 마지막 행이, 어쩌면 움켜쥔 욕망 내려놓고 금방 떠날 것이므로 ‘쬐끔만’ 욕심 부리라는 역설적인 말로 들립니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가득했던 단란했던 그 가족들도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는 말이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지난 주 중 한 날을 잡아, 고향에 가서도 만나지 못했던 진달래를 보기 위해서 강화 고려산 진달래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코로나19여서 올해도 여전히 고려산 산행로는 폐쇄되어 있었지만 인근 다른 산에 올라 고려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가장 가까운 곳까지 접근하여 멀찍이 바라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지금에서야 한창인 고려산의 진달래 꽃 그늘 아래 배낭에 싸 간 도시락을 벌여 놓고,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얼마나 많이 외쳤던지요!
전투하듯 목숨 걸고 발버둥 칠 일이 아니라 시인이 노래했듯 '어쩌다 한순간 /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에는 '잠시 세상 그만 두고 / 그 아래로 휴가'를 일부러 가면서 여유를 부려 볼일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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