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 봄의 화단에서 - 정끝별

석전碩田,제임스 2025. 4. 16. 06:00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 정끝별

쭉쭉 뻗은 봄솔숲 발치에 앉아
솔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 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부러진 가지의 풍장을 보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와 함께 무너지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를 붙잡고 있는 저 살아 있는 가지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살아 있는 가지 어깨가 처져 있다

살아 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살아 있다는 것은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한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마음이 송진처럼 짙다

- 시집 <삼천갑자의 복사빛>(민음사, 2005)

* 감상 : 정끝별 시인.

1964년 11월,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명지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석·박사를 취득, 명지대학교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는 모교인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1988년 <문학사상>에 ‘칼레의 바다’ 외 6 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94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 평론 부문에서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이 당선되었습니다. 시집으로는 <자작나무 내 인생>(세계사, 1996), <흰 책>(민음사, 2000), <삼천갑자의 복사빛>(민음사, 2005), <와락>(창비, 2008), <은는이가>(문학동네, 2014),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문학동네, 2019), <모래는 뭐래>(창비, 2023) 등이 있으며, 시론·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문학세계사, 1997),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하늘연못, 1999), <오록의 노래>(하늘연못, 2001), <파이의 시학>(문학동네, 2010)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 해설집으로 <시심전심>(문학동네, 2011), <돈 詩 >(마음의 숲, 2016), <삶은 소금처럼 그대 앞에 하얗게 쌓인다>(해냄, 2018) 등이 있습니다. 유심작품상(2004), 소월시문학상(2008), 청마문학상(2015), 현대시작품상(2021), 박인환상(2023) 등을 수상했습니다. 6년 전 이곳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에서 감상했던 그녀의 시 ‘가지가 담을 넘을 때’(https://jamesbae50.tistory.com/13410902)가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했습니다.

끝별 시인은 리듬과 이미지가 충만한 시어로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녀는 패러디에 관한 이론을 체계화하고 우리 현대 시에 접목하고 해석하여 그 문학적 역할과 의의를 정립하기도 하였고, 시 자체가 가진 무한한 언어의 가능성을 발견하여 평론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시를 써서 그것을 증명해 낸 시인으로도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014년 그녀의 다섯 번째 시집인 <은는이가>를 펴낼 때, 책의 서문에 썼던 <시인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다섯 번째 패를 돌린다// 이렇다 할 도박력도 없이 / 이렇다 할 판돈도 없이// 발바닥에 젖꼭지가 돋거나/ 손바닥에 닭살이 돋거나(2014년 10월/ 정끝별)’

치 대중 앞에 보잘것없는 시집을 내는 겸양을 나타내는 듯하지만, 다 읽고 나면 표현 하나하나가 돈을 걸고 치는 타자들의 고스톱판을 연상하는 듯한 탁월한 언어적인 패러디에 감탄하게 되는 짧은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난겨울은 갑자기 내린 습설(濕雪)로 인해 소나무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가지째 부러져버린 나무들이 마치 벼락을 맞은 듯 처참한 모습으로 북한산 등산길을 막은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목격할 수 있었지요. 아파트 화단에 심긴 소나무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난달에 있었던 아파트 대표자 회의에서 관리소장이 받아 제시한 몇 군데 조경업체의 견적서는 적은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시인이 겨울이 지나고 이제 봄이 온 꼭 요맘때쯤 봄 솔숲 발치에 앉아 폭설 때문에 부러져 위험하게 얹혀 있는 가지들을 올려다보면서, 살아 있는 가지와 죽은 가지의 관계를 우리네 삶에서 서로 운명적으로 얽혀있어야 하는 관계로 풀어낸 시입니다. ‘서로 덫인 채 / 서로에게 걸려 있는’ 묘한 관계를 시적 은유로 삼아 한 편의 시를 건져 올린 것입니다. ‘높은 허공에 /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 살아 있는 가지에 걸려 있’는 모습에서 ‘송진처럼’ 뒤엉켜 있는 우리네 인생의 모습과 같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 살아 있다는 것은 /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서로에게 걸려’ ‘엉킨 두 마음’을 시인은 ‘한 줄기에서 난 /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 차마 보내지 목한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끝내 서로에게 부담을 주면서 ‘살아 있는 가지 어깨’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해서 축 처져있다고 시인은 못내 아쉬워 하며 슬퍼합니다. 살아 있는 가지들은 서로 엉키지도, 걸리지도 않는데 죽은 가지는 살아 있는 가지마저 힘들게 한다는 대목에서, 나 스스로 살았다고 외치지만 혹시 죽은 가지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되돌아보게도 됩니다.

런 봄날에 딱 맞는 정끝별 시인의 시 한 편을 더 읽으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다섯 살배기 어린 아가와 함께 봄 화단에서 꽃씨를 심고, 화분에 꽃모종을 심는 엄마의 눈과 마음으로 꽃씨와 어린 아가가 뒤뚱뒤뚱 커가는 모습을 시적 은유로 삼아, 한 편의 시로 건져 올린 봄의 노래입니다.

봄의 화단에서

- 정끝별

아파트 화단에 앉아 꽃씨를 심는다
다섯 살배기 흙손가락에서 피어나는 봄흙의
귓불에선 아직도 말간 배냄새가 난다
,나도 씨였죠?
,이 씨도 쑥쑥 자랄 거죠?
한껏 치켜올린 입술이 나팔꽃처럼 둥글게 피어나고
꽃씨를 품은 봄흙을
다독이는 살빛 떡잎이 둘

타클라마칸 고비의 황사를 견디며
지구의 저 저 저 모퉁이를 견디며
씨에서 잎으로 꽃으로 몸 바꾸며
,나이테처럼
,쑥쑥 높아지는 키의 눈금들이
,해님에게 가는 계단이래!
꽃씨를 묻은 플라스틱 화분을 안고
계단을 오르는 위태로운 흙물 엉덩이를 보며
목숨을 피우려는 모든 것들은
저리 온몸으로 뒤뚱이며 오르는 것이구나

바람에 휘청,
넘어진 피와 멍이 너의 꽃이고 잎이었구나
저 계단에서  
잠시 붙잡고 선 난간이 너의 뿌리였구나

- <2004 제18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 2003)

끔 북한산 둘레길 삼천사 입구쯤에 화훼(花卉) 비닐하우스 단골집에 들르곤 합니다. 3년 전 이곳 은평 뉴타운으로 이사 온 후 소심이 산책을 시키다가 우연히 알게 된 곳으로, 다육이와 이쁜 꽃모종을 20년 전 가격으로 판다고 현수막을 커다랗게 내 건 분위기 있는 꽃집입니다. 며칠 전에도 갔다가 화사하게 핀 봄꽃들의 매력에 못 이기는 척하며 꽃 화분 몇 개를 구입해 왔습니다.

‘씨에서 잎으로 꽃으로 몸 바꾸며’ 자라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꽃이 핀 화분을 구입해 왔지만, 이 봄의 화단에서는 솟아나는 새싹들의 힘찬 합창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아마도 시인은 봄의 화단에서 그 노랫소리를 들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화분에 심긴 씨앗이 발아하여 온갖 풍상을 견딘 후 꽃을 피우고 목숨을 피워내듯이, 아기의 ‘살빛 떡잎’도 그렇게 쑥쑥 커갈 것을 목소리 높여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완연한 봄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