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봄의 제전 祭典 / 모란이 피네 - 송찬호

석전碩田,제임스 2025. 4. 23. 06:00

봄의 제전 祭典

- 송찬호

마침내 겨울은 힘을 잃었다
여자는 겨울의 머리에서
왕관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제 길고 지리한 겨울과의 싸움은 지나갔다
북벽으로 이어진 낭하를 지나
어두운 커튼이 드리워진 차가운 방에
얼음 침대에
겨울은 유폐되었다
여자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관은 숲속에 버려졌다
겨울은 벌써 잊혔다
오직 신생만을 얻기 바랐던
재투성이 여자는
봄이 오는 숲과 들판을 지나
다시 아궁이 앞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 부엌과 정원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오직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 시집 <분홍 나막신>(문학과지성사, 2016)

* 감상 : 송찬호 시인.

1959년 8월 5일,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중학교,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경북대학교 독어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그림 그리기는 일찍이 포기했고, 동해안에서 초병으로 군 생활을 하며 김춘수 시인의 시를 읽고 숨을 쉬듯 시를 쓰다가,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6호에 ‘금호강’, ‘변비’ 등의 시를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습니다.

학 졸업 후 아주 짧은 기간 직장 생활을 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1992년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중등학교 교사인 아내를 위해 4년 반에 걸쳐 한옥을 지었을 정도로 그는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강한 면도 있다고 시인의 아내는 말합니다.

집으로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민음사, 1989), <10년 동안의 빈 의자>(문학과 지성사, 1994), <붉은 눈, 동백>(문학과 지성사, 2000),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 지성사, 2009), <분홍 나막신>(문학과 지성사, 2016) 등이 있으며, 동시집 <저녁별>(문학동네, 2011), <초록 토끼를 만났다>(문학동네, 2017) 등이 있습니다. 2000년 제19회 김수영 문학상과 제13회 동서문학상(붉은 눈, 동백), 2008년 제8회 미당 문학상(가을 외), 2009년 제17회 대산문학상(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2010년 제3회 이상 시문학상, 2019년 제17회 애지문학상(악어의 수프) 등을 수상했으며, 2017년에는 ‘비상’으로 제3회 디카시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리나라의 현존하는 시인 중에서 시를 잘 쓰는 시인 다섯을 꼽으라면 송찬호 시인이 거론될 정도로 송 시인은 문단의 평이 좋습니다. '동화적이고 신비스러운 마법적 상상력을 풀어내면서 마음속에 대고 조곤조곤 말하는 듯한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 어린 시절에 들었던 한 편의 동화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에서부터, '요즘 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소리와 운율의 미학이 특별한 수준에서 성취되어 있어 매력적'이라는 평도 받고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를 읽으면 지난 2013년 개봉되어 OST ‘Let it Go!’로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 왕국>이 생각납니다. 시인도 아마 혹독한 겨울이 지나 드디어 찾아온 ‘완연한 봄’을 어떻게 묘사할까 생각하다 겨울 왕국 이야기를 시적 은유로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상한 마법의 덫에 걸려 겨울 왕국에 갇혀 있는 언니 ‘엘사’가 순수하고 지극한 동생 ‘안나’의 사랑에 감동되어 저주에서 풀려 마침내 따뜻한 봄을 맞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이 시 속에는 마치 깊은 강물처럼 내재(內在)되어 있는 듯 보인다는 말입니다.

인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의 전환을 그저 단순한 계절의 변화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겨울이 힘을 잃고 봄이 왔다는 사실을 '왕관이 굴러떨어지고 숲속에 버려졌다'고 표현하는 것만 봐도, 단순한 계절의 변화뿐 아니라 정권의 교체나 운명의 대전환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것이 분명합니다.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노래했다기보다는 고난과 시련의 기간은 드디어 끝나고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삶을 은유적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직도 현재 진행형이긴 하지만 지난겨울은 끔찍하리만치 혹독했습니다. 올 것 같지 않은 봄, 그리고 하마터면 역사에 길이길이 부끄럽고 불행한 역사로 남을 뻔했던 얼음 왕국 겨울이 지나고 이렇게 봄이 오고야 말아서 그런지, 9년 전에 발표한 이 시가 마치 올봄을 노래한 것처럼 제겐 더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주말, 큰 행사를 주관하는 회장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식 개회식에서 어떤 내용으로 개회사(開會辭)를 채워 볼 까 고민하다가, 결국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는 분명한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더디 왔지만, 마침내 봄이 왔다는 사실, ‘오직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화려한 계절, 아궁이 같은 따뜻한 봄날에 성대한 잔치를 벌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고, “서로가 싸워 무찔러야 할 적이나 원수가 아니라, 저분이 없으면 나의 운동 자체가 불가능한 ‘나의 동료’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게 하자”고 나름 목청껏 소리높였습니다.

에 피는 첫 꽃들, 즉 개나리 진달래 벚꽃 산수유 등이 지고 나면 다음 순서로 등장하는 봄꽃 중 단연 돋보이는 꽃은 ‘모란’입니다. 어제 내린 흡족한 봄비가 그치고 나면 시새워 벙글어 질 모란을 노래한 송찬호 시인의 시 한 편을 더 읽어 보려고 합니다. 이 시 속에도 송 시인만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동화적인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모란이 피네

- 송찬호

외로운 홀몸 그 종지기가 죽고
종탑만 남아 있는 골짜기를 지나
마지막 종소리를
이렇게 보자기에 싸 왔어요

그게 장엄한 사원의 종소리라면
의젓하게 가마에
태워 오지 그러느냐
혹, 어느 잔혹한 전쟁처럼
코만 베어 온 것 아니냐
머리만 떼어 온 것 아니냐,
이리 투정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

긴 긴 오뉴월 한낮
마지막 벙그는 종소리를
당신께 보여주려고,

꽃 모서리까지 환하게
펼쳐놓은 모란 보자기

- 시집 <분홍 나막신>(문학과 지성사, 2016)
- 육필 시집 <쑥부쟁이밭에 놀러 가는 거위같이>(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6)

로운 홀몸 종지기, 덩그러니 남은 종탑, 장엄한 사원의 종소리, 잔혹한 전쟁 등의 시어(詩語)가 불국사의 종소리 내지는 석가탑 다보탑의 전설, 에밀레 종소리 등 어릴 적 우리들의 꿈을 키워 준 아름다운 설화 이야기들이 생각나는 건 저만 그런 건가요. 시인은 그 이야기들을 모란꽃으로 고스란히 옮겨와 그 풍만한 아름다운 꽃에서 들리는 종소리로 묘사, 노래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발한 은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은 모란이 활짝 핀 모습을 보면서 노란 암술과 수술이 마치 종 속에서 소리를 내는 ‘종불알’을 연상한 듯이, 그리고 빨간 꽃잎이 비단 보자기가 되어 그 종에서 나는 장엄한 소리를 고스란히 감싸고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탐스러울 정도로 풍만한 모란을 보면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그 소리를 곱게 포장까지 했다고 상상하는 시인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도현 시인은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에서 송찬호 시인의 이 시를 소개하며 이제는 ‘5월 모란꽃에서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고 내심 기대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한 편의 시로 인해서 생각이 바뀌고 또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시가 있어야 할 이유인 듯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