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떠도는 자의 노래 / 낙타 - 신경림

석전碩田,제임스 2025. 4. 30. 06:00

떠도는 자의 노래

-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 시집 <뿔>(창비, 2002)

* 감상 : 신경림 시인.

1936년 4월 6일, 충북 충주 노은면 연하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낮달’, ‘석상’ 등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등단하였습니다.

난해 5월 22일, 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신경림 시인을 소개하며 그의 시 ‘목계장터’와 ‘나목’을 감상했던 적이 있습니다.(https://jamesbae50.tistory.com/13411873) 그리고 1년이 지난 오늘 또다시 시인의 시를 꺼내 읽습니다. 그동안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에서 신경림 시인을 여러 차례 소개하면서 제가 시인을 첨 알게 된 계기(https://jamesbae50.tistory.com/13411262), 또 그의 책을 통해서 시를 사랑하는 남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쓴 적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시인 중에서 치열한 시 정신으로 살아가는 시인으로 먼발치에서 존경의 대상으로 삼는 시인이었는데, 이제는 그도 ‘이 세상을 떠난 자’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노래했듯이 지금은 저세상 어느 골목길에서 ‘다시 이 세상에 /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지도 모’를 일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 ‘떠도는 자의 노래’를 읽으면 한곳에 가만히 정착해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저의 태생적인 습성을 노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격한 공감을 하게 됩니다. 시인은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대는 자신의 모습을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 놓고 온 것 같’고,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아 그것을 찾으러 온 사람의 모습으로 빗대어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에서 ‘외진 별정우체국’, ‘어느 삭막한 간이역’이 뜻하는 건 뭘까. 평생 시를 써온 그가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좋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했던 대답이 떠오릅니다. ‘남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 만지지 못하는 것을 듣고, 보고, 만져서 힘 있게 말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여전히 시인으로 목마름,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고 빠뜨리고 뭔가를 놓고 온 게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떠나는 그날까지 그것을 찾아다닐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 별정우체국이나 삭막한 간이역, 그리고 쓸쓸한 나룻가는 어쩌면 시대와 역사가 그에게 맡긴 것들에 대하여 충실하게 책무를 다하지 못한 부족한 자신을 성찰하며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건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세상 끝에 /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고 되뇌면서,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은 전생과 이생으로 연거푸 이어지는, 지금도 계속되는 ‘떠도는 자의 (거룩한) 노래’를 열심히 부르는 일이야 말로 자신의 참다운 사명이라고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며 다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년 계절의 여왕 5월에 황망히 떠난 그가 자신이 평소 노래했던 것처럼 진짜 ‘낙타를 타고’ 갔을까? 그의 시 ‘낙타’를 읽으면 그가 평생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를 쓰는 시인으로 살았고 또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는지 그 마음이 어렴풋이 엿보입니다.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 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 시집 <낙타>(창비, 2008)

치 유언장 같은 느낌이 드는 시입니다. 생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온통 회한이 짙게 깔린 노래입니다. 어떤 이는 이 시를 읽으면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생각난다고도 했습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살았던 자신과 ‘별과 달과 해, 모래만 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았던 낙타'를 동일시하는 화자는, 죽어 저승을 갈 때 낙타를 타고 천천히 가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누가 말 한대로 삶이 윤회한다면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낙타로 다시 오고 싶다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현재와 같은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성찰과 반성의 시이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현재와 같은 무욕(無慾)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노래한 시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가 이승을 떠난 지 딱 1년, 그가 예상한 것처럼 저세상의 어느 골목길에서 지금도 자신이 남겨두고 온 것을 찾고 있을까. 이 좋은 계절, 그가 떠난 5월이 다가오니 문득 시인이 그리워집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