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나목 - 신경림

석전碩田,제임스 2022. 2. 9. 05:48

裸木

-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시집,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 비평사, 1993)

* 감상 : 신경림 시인.

1936년 4월,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습니다. 노은초등학교, 충주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 ‘낮달’ ‘석상’ 등이 추천되어 등단하였습니다. 건강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 현대문학사, 희문출판사, 동화출판사 등에서 편집부 일, 그리고 공사판 노동, 광산 일, 농사 일등을 하면서 시 쓰는 일을 중단하기도 하였으나 1965년부터 여기저기 문예지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초기의 관념적인 시 세계에서 벗어나 농촌의 현실, 민중의 현실 등을 시 속에 녹여내는 작업에 매진하였으며 1992년 <민족작가회의> 회장, 1998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74년에는 첫 시집 <농무>로 만해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이밖에도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아산문학상, 1994년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1998년 공초문학상, 2001년 현대불교문학상, 2001년 4.19문화상, 은관문화훈장, 2002년 만해시문학상, 2009년 호암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97년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시집으로는 <농무(農舞)>(창작과비평사, 1973),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 <가난한 사랑노래>(실천문학사, 1988), <길>(창작과비평사, 1990),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 <갈대>(솔출판사, 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 <목계장터>(찾을모, 1999), <뿔>(창작과비평사, 2002), <신경림시선집>(창작과비평사, 2004), <낙타>(창비, 2008),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등이 있습니다. 산문집으로는 <민요기행1,2>,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1,2>(우리교육, 2013), <바람의 풍경> 등이 있습니다.

가 신경림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군 복무 시절, 우연히 접하게 된 그가 쓴 산문집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산문집의 제목도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가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경험했던 목격담을 쓰면서 시를 사랑하고 또 시인을 대우해 주는 그들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부러움 가득한 마음으로 쓴 글로 기억이 됩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예술가들이 묻혀있는 공동묘지의 어느 한 무덤에 꽃을 든 긴 행렬이 있어 저게 무엇이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러시아에서는 꽤 알려 진 어느 시인을 추모하기 위해서 추모일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꽃다발을 구입한 후 헌화하는 장면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꽃 다발을 구입하기 위해선, 당시 노동자들이 일주일 벌어야 하는 봉급이라는 것이었는데, 이 장면을 목격하면서 신경림 시인은 옛 소련이 몰락하여 지금은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못 살지만, 문학을 사랑하고 시를 사랑하는 그들의 ‘문화 수준’은 우리가 결코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후, 이런 진솔한 글을 쓰는 신경림 시인은 어떤 분인가 궁금해 하면서 그의 시를 찾아 애송하게 되었고 마침 발간된 그의 책,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1, 2권을 통해 항상 시험 준비를 위해서만 겨우 읽었던 시와 시인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신경림의 ‘나목(裸木)’은 잎을 모두 떨구고 매서운 겨울 추위를 견디고 있는 앙상한 ‘나목’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시입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나무를 시인은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라고 표현하며 인간과 동일시합니다.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다고, 또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와 같은 표현은 나무나 인간이 숙명처럼 동일한 처지임을 밝히는 묘사들입니다. 시인은 시의 마지막 행에서 ‘나목’의 울음에 같이 울어주는 존재가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숙명적으로 동일한 존재인 나무와 인간의 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친절까지 베풀고 있습니다.

롭게 살아보려고 결단을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분이라면 이런 때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전화를 해 놓고선, 아무 말 없이 그저 가슴이 북받쳐 훌쩍거리며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저 전화선 저쪽 끝에서 나를 이해하고 나를 위해서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그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힘이 되고 또 위안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시인이 시의 마지막 행,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노래할 때도 바로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위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지만 절기는 절대로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입춘이 지나자 이미 땅 속에선 봄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우연히 마당 한 켠, 상사화가 있던 자리를 보았더니 초록색 새싹이 벌써 얼굴을 내밀고 있더군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지난 겨울이 더 춥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 모든 암울한 터널의 끝입니다. ‘앙상하게 두 팔 벌리고, 오직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나목같은 누군가에게’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 새봄을 맞고 싶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