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유월이 오면 - 도종환

석전碩田,제임스 2025. 6. 4. 06:00

유월이 오면

- 도종환

아무도 오지 않는 산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마디만
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남북 산천을 따라 밀 이삭 마늘 잎새를 말리며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바람의 그리움입니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도 혼자 보고 있으면
사위는 저녁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사는 동안 온갖 다 이룩된다 해도
그것은 반쪼가리일 뿐입니다

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
가슴 반쪽은 늘 비워둔 반평생의 것일 뿐입니다
그 반쪽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빗줄기를 보내 감자순을 아름다운 꽃으로 닦아내는
그리운 당신 눈물의 몫입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지 않고는
내 삶은 완성되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꼭 다시 당신을 만나야만 합니다.

- 시집 <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 1986.12)

* 감상 : 도종환 시인.

1955년 9월 27일 충북 청주시 운천동 산정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충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그리고 충남대학교에서 현대 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학 졸업 후 청주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청주 중앙중학교 교사로 재직할 1989년 전교조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가 그해 직위 해제되었습니다. 1991년부터 4차례 전교조 충북도 지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98년 진천군 덕산 중학교 교사로 복직하였으나 지병으로 2004년 3월 사직하였습니다. 1985년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간 아내와 사별하였고, 다음 해인 1986년 발간된 시집 <접시꽃 당신>이 히트 치면서 시인으로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집으로 <고두미 마을에서>(창비, 1985), <접시꽃 당신>(실천문학, 1986), <내가 사랑한 당신은>(1988), <몸은 비록 떠났지만>(실천문학, 1989),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제삼문학사, 1989), <당신은 누구입니까>(창비, 1993),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1994), <부드러운 직선>(창비, 1998), <슬픔의 뿌리>(실천문학, 2005), <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2006),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 2011), <사월의 바다>(창비, 2020),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창비,2024) 등이 있습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그 후 2016년 제20대,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 충북 청주 흥덕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취임, 22개월을 근무하고 2019년 4월 퇴임하였습니다. 이후, 문단에 복귀하여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창작과 비평사, 2024)을 발표하였습니다.

동엽 창작기금상, 민족예술상, 제비꽃시인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백석문학상, 공초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늘은 멋진 계절 6월에 읽을만한 시를 한번 골라봤습니다.

인이 해마다 감자꽃 피는 유월, 당신이 잠들어 있는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있는 이곳 산속에 오면, ‘빗줄기를 보내 감자순을 아름다운 꽃으로 닦아내는’ 먼저 보낸 ‘당신’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애틋한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 등장하는 먼저 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해마다 유월이 오면 생각 나는 민족의 비극인 ‘전쟁’으로 인해 생이별로 남과 북으로 헤어져 사는 우리네 동포를 의미한다고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감자꽃’ 이야기를 하면 감자도 꽃을 피우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참 많습니다. 구황 식물인 감자는 그저 배고픈 시절 양식 대용으로 쓰이는 식용 작물로만 생각했지, 꽃이 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맘때쯤 피는 감자꽃이 시인들의 시에 자주 등장하곤 하는데, 감자꽃의 시적(詩的) 이미지는 화려함보다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슬픈 정서를 노래하는, 말하자면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어야 했던 가난한 시절 서민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은유’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감자꽃의 이미지를 ‘빗줄기를 보내 아름다운 꽃으로 닦아내는 / 그리운 당신 몫의 눈물’이라고 표현하여 ‘슬픔’이나 ‘그리움’과 동일시하며 절절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도 오지 않는 적막한 산속에 있는 감자밭에는 바람 소리, 뻐꾸기 소리만 가득한데, 그 소리가 시인의 귀에는 온통 ‘사랑한다’는 소리, 그 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소리로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 깃발이 수없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그리움으로 되살아나 아픈 마음을 견딜 수 없게 한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적인 전쟁으로 우리가 헤어져 있어야 했던 것이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후 서로 만나지 못하고 반쪽으로 나뉘어 서로를 그리워하는 이 모습이 더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시인은 울부짖고 있습니다.

난 몇 개월 동안은 마치 거대한 폭풍우가 엄청난 파괴력으로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 듯합니다. 우리 가운데 그동안 켜켜이 쌓여 있던 냄새나고 더러운 것들을 온통 뒤집어 놓고 지나간 어마어마한 ‘쓰나미’처럼, 그 위력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새로운 하루를 맞았습니다.

제 치르진 제21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본인이 선택한 사람이 당선되었든 아니면 그 반대이든 상관없이 어김없이 화사한 유월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계절, 6월을 노래하는 싱그런 시 몇 편을 덤으로 감상하면서, 이제 우리 앞에 펼쳐진 새로운 날들을 화합과 희망에 찬 계절로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석전(碩田)

6월이 오면

- Robert Bridges

6월이 오면, 하루 종일
내 사랑과 향긋한 건초더미에 앉아,
산들바람 부는 하늘에 흰 구름들이 짓는,
햇살 눈부신 높은 궁전들을 바라볼 거야.

그녀는 노래하고, 나 그녀 위해 노래를 짓고,
하루 종일 달콤한 시들을 읽어야지:
아무도 모르게 건초로 지은 우리 집에 누우면,
오, 인생은 즐거워라, 6월이 오면.

- 로버트 브리지스(Robert Bridges, 1844~1930)

6월의 장미

- 이해인

하늘은 고요하고
땅은 향기롭고 마음은 뜨겁다

6월의 장미가
내게 말을 건네옵니다

사소한 일로
우울할 적마다
‘밝아져라’
‘맑아져라’
웃음을 재촉하는 장미

삶의 길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낼 수 있다고

누구를 한 번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
6월의 넝쿨장미들이
해 아래 나를 따라오며
자꾸만 말을 건네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에
내가 눈물 속에 피워 낸
기쁨 한 송이 받으시고
내내 행복하십시오

- 이해인 시집 <풀꽃 단상>(분도출판사, 2006)

유월의 언덕

- 노천명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 노천명 제4시집 <사슴의 노래>(한림사, 1958)

6월

- 이외수

바람 부는 날 은백양나무 숲으로 가면
청명한 날에도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귀를 막아도 들립니다
저무는 서쪽 하늘
걸음마다 주름살이 깊어가는 지천명(知天命)
내 인생은 아직도 공사 중입니다
보행에 불편을 드리지는 않았는지요
오래 전부터
그대에게 엽서를 씁니다
그러나 주소를 몰라
보낼 수 없습니다
서랍을 열어도
온 천지에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한평생 그리움은 불치병입니다

- 시집 <그대 이름 내 가슴에 숨 쉴 때까지>(해냄출판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