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먹어도 개와는 안 먹는다

남 생각

석전碩田,제임스 2008. 8. 9. 18:23

어릴 적 피난길에서의 일이다. 쌀을 지고 기약 없는 피난을 가던 길이라 쌀을 아끼고 아껴 끼니라도 때우고 있었다. 걸어서 가는 피난길이라 갈수록 지쳐 있었고 나는 늘 배가 고팠다. 그 날도 날 이 저물어 어찌어찌 어느 집 문간방을 빌려 하룻밤 묵기도 하고 어머니는 저녁을 지으셨다. 허겁지겁 내 몫을 다 먹고도 성이 안찼다. 어머니는 눌은 밥에 물을 부어 내게 주셨다. 배도 고팠지만 워낙 좋아하는 눌은 밥이라 널름 받아들고 먹으려 했다. 그때 아버지가 “내가 그걸 먹으면 어머니는 무얼 먹겠니?” 하셨다. 부끄럽고 서러웠다.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늘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그때 어머니는 남는 것이 없으면 굶고 계시다는 걸 몰랐다.

 

대학시절 입주 가정교사를 하던 때였다. 아주 잘 사는 집이었다. 목욕이라면 겨우 한달에 한 번이나 공중목욕탕엘 가는 시절인데 그 집에선 주말마다 집에서 물 데워 목욕을 하였다. 겨울 어느 주말에 식모 아주머니 (그땐 가정부를 그렇게 불렀다)가 물을 데웠다고 내가 가르치는 아이에게 전했다. 그 아이 목욕 후 나도 목욕을 할 수 있는 거였다. 그 날 이후 항상 친절하던 그 아주머니는 누구나 알아보게 나를 싫어하였다. 후에 알고 보니 그 목욕하는 날 아주머니도 목욕을 하려고 별렀는데 내가 물을 다 써버려 목욕을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도 눈치가 없다니, 한심했다.

 

유학길에 올라 여러 시간 비행기에 시달리고 입국수속에 시달리고 하여 드디어 친구네 집에 여장을 풀었다. 목욕부터 하래서 난생처음 욕조와 샤워가 함께 있는 미국집의 욕실에서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산뜻한 기분으로 목욕을 마치고 친구와 마주 앉았다. 그 친구 말이 “야, 목욕했음 욕조청소를 해야지.” 하였다. 욕조의 머리카락, 비누 때 등을 처리했어야 했다. 미국 도착 후 첫 부끄러움이었다. 그 다음에 목욕탕을 사용할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후부터 목욕 후 목욕탕 청소는 습관되어 철저히 했다. 한 번은 학회에 참석해서 미국인(흑인이었다) 교수와 같은 방을 썼다. 아침에 그가 먼저 목욕을 했다. 내가 들어가 보니 청소가 안 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의 할아버지까지도 노예였다며 자신의 성공을 늘 자랑하였다. 그래도 몸에 밴 문화수준은 어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경험들을 토대로 나는 그 후 나의 아이들에게 목욕탕 사용법을 철저히 가르쳤다.   “화장지를 다 썼으면 새 것을 준비해 두어라,” “욕조는 깨끗이 청소 하여라,” “다음 사람이 필요로 할 것을 꼭 생각하여라.” 등이다. 또 들어온 후 신발정리도 가르쳤다. 다음에 들어오고 나갈 사람을 생각해서 꼭 정리해 놓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우리사회는 도무지 남을 생각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우리도 농경사회 시절에는 이웃사촌이라고 할 정도로 서로 돕고 살았다. 산업사회로 되면서 또 서로 경쟁관계에 있게 되면서부터 변한 것 같다. 또는 각각의 이해가 달라짐으로 서로 무관심해 지면서 그렇게 된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모두 물질지상주의에 빠지고 다양화되는 사회현상에 적응하지 못하여 남의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자신의 앞치레 급급하여 공공생활이나 함께 사는 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 같다. 하여간 남의 생각을 못한다. 남은 생각지 않고 제 자리만 챙기고, 옆 사람은 생각지 않고 소리질러댄다. 쓰레기는 아무데나 버린다. 대학의 강의실, 복도, 화장실도 엉망이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 보기 부끄러울 지경이다. 전혀 남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는다.

 

차는 아무데 세워둔다. 밤새 차를 어느 식당 문 앞에 세워두어 아침에 식당 아주머니가 발을 동동 구르는 걸 보았다. 인도가 주차장 된 것은 오래 전 일이고, 걷는 사람 비키라고 빵빵거리기까지 하는 지경이다. 한 차선을 차지하고 세워 놓고는 운전석 문 열어놓고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예사다. 지난 여름 이웃에서 집을 지었다. 먼지 때문에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소음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 어떻게 좀 해결책이 없느냐고 하니까 낮에 좀 다른데 가 있다가 오란다. 공사를 잘못해서 우리 집 담이 무너졌다. 항의 했더니 집 짓고 다시 쌓아 주면 될 거 아니냐는 대답이었다. 이 정도면 남을 생각하지 못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남의 살 권리’ 를 빼앗는 행위이다. 이에 대해 행정당국도 해주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서구인들의 남에 대한 고려는 그저 감탄할 정도다. 남에게 폐 안되게 생활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 태도는 공공장소, 공공기물 사용에서 잘 나타난다. 식당에서 떠들거나 혼잡을 부리는 아이는 없다. 공원은 언제나 깨끗하고 조용하다. 모두들 지켜야 할 규정들을 잘 지킨다. 자연 누구나 방해받지 않고 즐길 수가 있다. 그들은 다양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비결을 모두 알고 있다. 집 칠을 할 때에도 이웃집들의 색깔을 고려해서 어울리는 색을 선택하는 그들이다. 그들은 남에게 폐 안 끼치고 방해 안 할 뿐 아니라 나아가 남 돕기를 즐겁게 하는 이들이다.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을 기꺼이 돕고 도움을 청하면 누구나 흔쾌히 나서 돕는다. 눈오면 집 앞 눈은 반드시 쓴다. 자기 집 앞에서 넘어져 다치면 주인 책임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남 생각해서다.

 

우리도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문화인의 태도이다. 그것도 과부라야 과부사정 아는 정도로는 안 된다. 유부녀도 과부사정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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