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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강의 / 물 - 임영조

시학 강의 - 임영조 대학에 출강한 지 세 학기째다 강의라니! 내가 무얼 안다고? '시창작기초' 두 시간 '시전공연습' 두 시간 나의 주업은 돈 안 되는 시업(詩業)이지만 강사는 호사스런 부업이다 매양 혀 짧은 소리로 자식 또래 후학들 앞에 선다는 자책이 수시로 나를 찌른다 ―시란 무엇인가? ―생이 무엇인지는 알고? 나도 아직 잘은 모른다, 다만 삼십년 남짓 내가 겪은 황홀한 자학 그 아픈 체험을 솔직히 들려줄 뿐이다 누가 보면 딱하고 어림없는 짝사랑 설명하기 무엇한 상사몽 같은 그 내밀한 시학을 가르쳐줄 뿐이다 ―시란 무엇인가?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게 정 알고 싶으면 너 혼자 열심히 쓰면서 터득하라! 그게 바로 답이니…… 오늘 강의 이만 끝. - 시집 (창작과 비평사, 1999) * 감상 : 임..

부부 - 문정희 / 함민복

부부 - 문정희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

오갈피를 자르며 / 면례(緬禮) - 김영석

오갈피를 자르며 - 김영석 가을 햇볕이 아늑한 소나무 장작가리 옆에 앉아 약에 쓸 오갈피를 자른다 철마다 몸살 하며 꽃 피고 열매 맺던 오갈피는 이제 한살이를 마치고 탕관 속에서 솔바람 소리를 내며 바람결처럼 병을 쓰다듬는 쓰디쓴 한잔의 물이 되리라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면 삶이란 물결 지며 흘러가는 강물이구나 슬픔도 기쁨도 괴로움도 크고 작은 물이랑으로 흐르는구나 강물이 어찌 물결도 없이 고요히 멈추어 흐를 수 있으랴 삶이 곧 병이고 병이 곧 물결인 것을 햇볕 든 소나무 장작가리 옆에서 따뜻하게 흘러가는 쓰디쓴 물을 새삼 다시금 바라본다. - 시집 (시학, 2011) * 감상 : 何人 김영석. 1945년 전북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주 북중학교와 전주고를 졸업하 고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물끓이기 / 참숯 -정양

물끓이기 - 정 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