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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 - 곽효환

오래된 책 - 곽효환 하늘 가득 펑펑 쏟아진 눈 쌓이고 동장군이 동네 꼬마들의 바깥출입을 꽁꽁 묶은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감자며 고구마를 삶고 누이와 나와 사촌들은 구들방 아랫목에 깐 이불에 발을 묻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릴 적 약을 잘못 먹은 탓에 길눈이 어둡고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어느새 마을 최고의 흉내쟁이이자 이야기꾼이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밤 깊어도 마를 줄 모르고 아이들은 졸린 눈을 부비며 귀를 세우다가 하얀 눈을 소리도 자국도 없이 밟으며 온다는 눈 귀신에 진저리 치곤 했다 다음 날이면 나는 말 한마디 토씨 하나 숨소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워서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 서사 그 느낌 그 흥분을 에워싼 동리 아이들 앞에서 재현하는 이야기꾼이 되곤 했다 아직 글을 다 깨..

그 사람 - 허홍구

그 사람 - 허홍구 급하다고 - 꼭 갚겠다고- 날 못 믿으시냐고- 그래서 가져간 내 돈 2천만 원 자식들에게도 내가 돈이 어딨노 했고 마누라도 모르는 내 쌈짓돈 그 돈 그만 떼이고 말았다 애타게 찾던 그 사람 몇 개월 만에 전화가 왔다 제가 그 돈은 꼭 갚아야 한다며 은행통장 번호를 알려 달란다 자기 식당 말아먹고 남의 집에서 하루 일당 5만원을 받아 어떤 날은 3만원을 또 어떤 날은 2만원을 통장으로 넣어준다 오늘도 그 사람 행방은 모르고 눈물 3만원어치를 받았다 기쁨도 3만원어치 받았다 돈보다 귀한 눈물을 받았다 내게 그 눈물은 행복이다 나도 눈물 3만원어치를 보낸다 ㅡ 시집 (북랜드,2012) * 감상 : 허홍구 시인. 1946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시인이자 수필가이면서 현재 공동대표와 인 ‘광..

맨발 - 문태준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ㅡ,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

곤을동 - 현택훈

곤을동 - 현택훈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별도봉 아래 산과 바다가 만나 모여 살던 사람들 원담에 붉은 핏물 그득한 그날 이후 이제 슬픈 옛날이 되었네 말방이집 있던 자리에는 말발자국 보일 것도 같은데 억새밭 흔드는 바람소리만 세월 속을 흘러 들려오네 귀 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소리 원담 너머 테우에서 멜 후리는 소리 어허어야 뒤야로다 풀숲을 헤치면서 아이들 뛰어나올 것만 같은데 산 속에 숨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지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으면 돌아올까 송악은 여전히 푸르게 당집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는데 목마른 계절은 바뀔 줄 모르고 이제 그 물마저 마르려고 하네 저녁밥 안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