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449

그 사람 - 허홍구

그 사람 - 허홍구 급하다고 - 꼭 갚겠다고- 날 못 믿으시냐고- 그래서 가져간 내 돈 2천만 원 자식들에게도 내가 돈이 어딨노 했고 마누라도 모르는 내 쌈짓돈 그 돈 그만 떼이고 말았다 애타게 찾던 그 사람 몇 개월 만에 전화가 왔다 제가 그 돈은 꼭 갚아야 한다며 은행통장 번호를 알려 달란다 자기 식당 말아먹고 남의 집에서 하루 일당 5만원을 받아 어떤 날은 3만원을 또 어떤 날은 2만원을 통장으로 넣어준다 오늘도 그 사람 행방은 모르고 눈물 3만원어치를 받았다 기쁨도 3만원어치 받았다 돈보다 귀한 눈물을 받았다 내게 그 눈물은 행복이다 나도 눈물 3만원어치를 보낸다 ㅡ 시집 (북랜드,2012) * 감상 : 허홍구 시인. 1946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시인이자 수필가이면서 현재 공동대표와 인 ‘광..

맨발 - 문태준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ㅡ,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

곤을동 - 현택훈

곤을동 - 현택훈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별도봉 아래 산과 바다가 만나 모여 살던 사람들 원담에 붉은 핏물 그득한 그날 이후 이제 슬픈 옛날이 되었네 말방이집 있던 자리에는 말발자국 보일 것도 같은데 억새밭 흔드는 바람소리만 세월 속을 흘러 들려오네 귀 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소리 원담 너머 테우에서 멜 후리는 소리 어허어야 뒤야로다 풀숲을 헤치면서 아이들 뛰어나올 것만 같은데 산 속에 숨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지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으면 돌아올까 송악은 여전히 푸르게 당집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는데 목마른 계절은 바뀔 줄 모르고 이제 그 물마저 마르려고 하네 저녁밥 안칠..

시학 강의 / 물 - 임영조

시학 강의 - 임영조 대학에 출강한 지 세 학기째다 강의라니! 내가 무얼 안다고? '시창작기초' 두 시간 '시전공연습' 두 시간 나의 주업은 돈 안 되는 시업(詩業)이지만 강사는 호사스런 부업이다 매양 혀 짧은 소리로 자식 또래 후학들 앞에 선다는 자책이 수시로 나를 찌른다 ―시란 무엇인가? ―생이 무엇인지는 알고? 나도 아직 잘은 모른다, 다만 삼십년 남짓 내가 겪은 황홀한 자학 그 아픈 체험을 솔직히 들려줄 뿐이다 누가 보면 딱하고 어림없는 짝사랑 설명하기 무엇한 상사몽 같은 그 내밀한 시학을 가르쳐줄 뿐이다 ―시란 무엇인가?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게 정 알고 싶으면 너 혼자 열심히 쓰면서 터득하라! 그게 바로 답이니…… 오늘 강의 이만 끝. - 시집 (창작과 비평사, 1999) * 감상 : 임..

부부 - 문정희 / 함민복

부부 - 문정희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

오갈피를 자르며 / 면례(緬禮) - 김영석

오갈피를 자르며 - 김영석 가을 햇볕이 아늑한 소나무 장작가리 옆에 앉아 약에 쓸 오갈피를 자른다 철마다 몸살 하며 꽃 피고 열매 맺던 오갈피는 이제 한살이를 마치고 탕관 속에서 솔바람 소리를 내며 바람결처럼 병을 쓰다듬는 쓰디쓴 한잔의 물이 되리라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면 삶이란 물결 지며 흘러가는 강물이구나 슬픔도 기쁨도 괴로움도 크고 작은 물이랑으로 흐르는구나 강물이 어찌 물결도 없이 고요히 멈추어 흐를 수 있으랴 삶이 곧 병이고 병이 곧 물결인 것을 햇볕 든 소나무 장작가리 옆에서 따뜻하게 흘러가는 쓰디쓴 물을 새삼 다시금 바라본다. - 시집 (시학, 2011) * 감상 : 何人 김영석. 1945년 전북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주 북중학교와 전주고를 졸업하 고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물끓이기 / 참숯 -정양

물끓이기 - 정 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김승희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내 시를 찾아가다가 - 임보

내 시를 찾아가다가 - 임보 란 내 글이 담양의 어느 떡갈비집에 크게 걸려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처럼 고향 내려가는 길에 찾아갔더니 몰려드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다 얼마나 기다려야 되느냐고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50분도 더 넘어야 한다는 대답이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이리 붐빈 걸 보면 이 집의 남다른 비결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일정에 쫓겨 그 집의 갈비 맛도 못 보고 되돌아오면서 차 속에서 생각한다 음식 맛도 음식 맛이겠지만, 어쩌면 시가 걸린 집이어서 세상의 구미를 당긴 건 아닌지― 걸린 시의 작자가 찾아왔다고 주인에게 밝혔다면 혹 자리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아내는 투덜거리고, 아들 녀석은 농담 삼아 무단 게시에 대한 저작권을 운운하기도 하지만― 시가 밀려나고 있는 삭막한 이 시대에 손님들로..

단추를 채우면서 / 직소폭포에 들다 - 천양희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군가에게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든다는 걸. - 시집 (창작과비평사,1998) * 감상 : 천양희 시인. 1942년 1월 부산 사상에서 태어나서 경남여중고,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65년 대학 3학년일 때 당시 연세대 교수였던 박두진 시인이 발행하던 당시 유일한 문예지 추천으로 '庭園 한때', '아침', '和音'을 발..

8월의 눈사람 / 민박 - 권대웅

8월의 눈사람       - 권대웅    여름내   해바라기가 머물던 자리   나팔꽃이 피었다 사라진 자리   목이 쉬도록 살아 있다고   매미가 울어대던 자리   그 빈자리   흔적도 없이 태양 아래 녹아버린   8월의 눈사람들     폭염 한낮   밥 먹으러 나와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후줄근 흘러내리는 땀에   나도 녹아내리고 있구나   문득 지구가 거대한 눈사람이라는 생각   눈덩이가 뒹굴면서 만들어놓는   빌딩들 저 눈사람들     8월 염천(炎天)   해바라기가 있던 자리   화들짝 나팔꽃이 피던 자리   내가 밥 먹던 자리   돌아보면   그 빈자리     선뜻선뜻, 홀연, 가뭇없이    - 시집,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문학동네, 2003)     * 감상 : 권대웅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