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437

단추를 채우면서 / 직소폭포에 들다 - 천양희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군가에게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든다는 걸. - 시집 (창작과비평사,1998) * 감상 : 천양희 시인. 1942년 1월 부산 사상에서 태어나서 경남여중고,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65년 대학 3학년일 때 당시 연세대 교수였던 박두진 시인이 발행하던 당시 유일한 문예지 추천으로 '庭園 한때', '아침', '和音'을 발..

8월의 눈사람 / 민박 - 권대웅

8월의 눈사람       - 권대웅    여름내   해바라기가 머물던 자리   나팔꽃이 피었다 사라진 자리   목이 쉬도록 살아 있다고   매미가 울어대던 자리   그 빈자리   흔적도 없이 태양 아래 녹아버린   8월의 눈사람들     폭염 한낮   밥 먹으러 나와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후줄근 흘러내리는 땀에   나도 녹아내리고 있구나   문득 지구가 거대한 눈사람이라는 생각   눈덩이가 뒹굴면서 만들어놓는   빌딩들 저 눈사람들     8월 염천(炎天)   해바라기가 있던 자리   화들짝 나팔꽃이 피던 자리   내가 밥 먹던 자리   돌아보면   그 빈자리     선뜻선뜻, 홀연, 가뭇없이    - 시집,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문학동네, 2003)     * 감상 : 권대웅  시인. ..

병상 일기 / 슬픈 날의 일기 - 이해인

병상 일기      - 이해인      아플 땐 누구라도 외로운 섬이 되지    하루 종일 누워 지내면    문득 그리워지는 일상의 바쁜 걸음    무작정 부럽기만 한 이웃의 웃음소리    가벼운 위로의 말은 가벼운 수초처럼 뜰 뿐    마음 깊이 뿌리내리진 못해도    그래도 듣고 싶어지네.    남들 보기엔 별것 아닌 아픔이어도    삶보다는 죽음을 더 가까이 느껴보며    혼자 누워 있는 외딴 섬    무너지진 말아야지    아픔이 주는 쓸쓸함을    홀로 견디며 노래할 수 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삶을 껴안는 너그러움과    겸허한 사랑을 배우리.      - 시집, 희망은 깨어 있네> (마음산책, 2010년)     * 감상 : 이해인 시인, 수녀.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습니다...

환하다는 것 - 문 숙

환하다는 것      - 문숙   중심이 없는 것들은 뱀처럼 구불구불   누군가의 숨통을 조이며 길을 간다   능소화가 가죽나무를 휘감고   여름 꼭대기에서 꽃을 피웠다   잘못된 것은 없다   시작은 사랑이었으리라      한 가슴에 들러붙어 화인을 새기며   끝까지 사랑이라 속삭였을 것이다   꽃 뒤에 감춰진 죄   모든 시선은 빛나는 것에 집중된다   환하다는 것은   누군가의 고통 위에서 꽃을 피웠다는 말   낮과 밤을 교차시키며   지구가 도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돌고 돌아 어느 전생에서   나도 네가 되어 본 적 있다고   이생에선 너를 움켜잡고   뜨겁게 살았을 뿐이라고   한 죽음을 딛고 선   능소화의 진술이 화려하다      — 문학청춘> 2017년 여름호     * 감..

남주 생각 - 정희성

남주 생각 - 정희성 남주는 시영이나 내 시를 보며 답답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뉘 섞인 밥을 먹듯 하는 어눌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시영이나 나는 죽었다 깨도 말과 몸이 함께 가는 남주 같은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기껏 목청을 높여보았자 자칫 목소리가 따로 놀 테니까 시영이도 그렇겠지만 나는 나대로 감당해야 할 몫이 따로 있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건 무슨 변명 같기도 하고 비겁한 듯도 하고 하여튼 일찍 간 남주 생각을 하면 내가 너무 오래 누렸다는 느낌이다 - (창비, 2019) * 감상 : 정희성 시인. 1945년 2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부터 숭문고등학교 교사로 35년 교단을 지키다가 정년 퇴직했습니다. 1970년 동아..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 6 - 김용락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 6    - 김용락     가만히 생각해보니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반달]의 윤석중 옹이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새싹문학상을 주시겠다고 안동 조탑리 권정생 선생 댁을 방문했다 수녀님 몇 분과 함께, 두 평 좁은 방 안에서 상패와 상금을 권 선생께 전달하셨다 상패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권 선생님 왈   "아이고 선생님요, 뭐 하려고 이 먼 데까지 오셨니껴?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한 게 뭐 있다고 이런 상을 만들어 어른들끼리 주고 받니껴?   내사 이 상 안 받을라니더......"   윤석중 선생과 수녀님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서울로 되돌아갔다   다음날 이른 오전 안동시 일직면 우체국 소인이 찍힌 소포로 상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