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449

겨울 수화(手話) - 최승권

겨울 手話(수화)  - 최승권   몇 몇은 보이지 않았다졸업식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키 작은 여학생들을 일제히 흐느끼게 할 때서울 어느 목공소 조수로 취직했다는 광오와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상동이의 얼굴은금간 유리창 너머 갈매기 두 마리로 날아오르고교정 구석 단풍나무 한 그루로 선나는 노을이 지는 바다를 훔쳐보았다.   싸락눈 잘게 뿌리던 날문뜰나루 건너온 그놈들이조회시간에 불쑥 내민 김뭉치를 받았을 때지방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서정적인 시골 중학교 선생님이 된 나는그놈들의 부르트고 째진 손등과교실바닥에 나뒹굴던 해우무침 조각을 보고바다를 따라 흔들리는 유채꽃의 희망과황토밭을 흐르는 고구마 줄기의 자유에 대해서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일까.   해우 한 장보다도 얇은 졸업장을 주면서바닷가 갯물냄..

바다에 누워 - 박해수

바다에 누워       - 박해수     내 하나의 목숨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본다    설익은 햇살이 따라오고    젖빛 젖은 파도는 눈물인들 씻기워 간다    일만(一萬)의 눈초리가 가라앉고    포물(抛物)의 흘러 움직이는 속에   뭇 별도 제각기 누워 잠잔다    마음은 시퍼렇게 흘러 간다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가 될까    물살이 퍼져감은    만상(萬象)을 안고 가듯 아물거린다.    마음도 바다에 누워 달을 보고 달을 안고    목숨의 맥(脈)이 실려간다    나는 무심(無心)한 바다에 누웠다    어쩌면 꽃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외로이 바다에 누워 이승의 끝이랴 싶다.     - 시집『바다에 누워』(심상사, 1980)   .........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너무 아픈 사랑 - 류근

너무 아픈 사랑    - 류 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그 유행가 가사,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 시집『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 감상 : 일요일 저녁, ..

아내의 정부 - 문동만

아내의 정부 - 문동만   다시 저 사내 아내는 아파 드러누웠고 잠시 아내의 동태를 살피러 집에 들른 것 어떤 남자가 양푼에 식은밥을 비벼 먹다가 그 터지는 볼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 그렇지 오랜 세월 아내의 정부였다는 저 남자 늘 비닐 봉다리를 가방처럼 들고 다니며 옛 여자의 냉장고를 채워주는 게 업이라는 사람 평생 조적공으로 밥을 벌어먹었고 시멘트가루 탓인지 담배 탓인지 목구멍에 암 덩어리를 달고서야 일도 담배도 놓았다는 저 사내 늘 성실했으나 사기꾼들에게 거덜났던 사내다 아픈 옛 여자를 위해 공양인 양 쌀죽을 쑤어 바치고 잔반을 털어 비벼 늦은 점심을 때우고 간다 온다 말없이 문을 잠그고 돌아가는 이 오래보는 삽화의 주인공 나도 이 한낮 그처럼 쓸쓸하여 그가 앉았던 식탁을 서성거린다 개수대는 밥풀 하..

무소유 - 백무산

무소유 - 백무산   굶주리는 사람이 건강단식을 어떻게 이해하나없는 사람이 무소유를 어떻게 이해하나글자 조합이 잘못된 낱말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잃을 것은 사슬뿐인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떨쳐 일어날 거라지만그들도 잃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거지는 동냥 구역을 잃을 게 있지없을수록 집착할 수밖에   거액의 자산가가 방송에 나와 무소유의 자유로움에 대해진지한 표정으로 말할 때 그건 진심이었을 거다무소유의 청빈함을 제대로 글로 쓰는 작가는 좀 살 만한 작가다어디 가나 밥과 집이 넉넉한 스님이라야 무소유를 제대로 설법할 수 있다   무소유는 가진 뒤의 자유다무소유는 ‘소유’가 있은 뒤 조합된 낱말이다다 내려놓은 사람의 무소유는 이미 그 낱말이 아니다   가진 것이 있어..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 박우현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 박우현   이십 대에는서른이 두려웠다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마흔이 되니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대에는마흔이 두려웠다마흔이 되면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쉰이 되니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모든 그때는 절정이다모든 나이는 아름답다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 시집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작은숲,2014)   * 감상 : 한 해를 보내는 년말이 다가오는 이즈음부터 송년 모임에 오라는 연락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12월에는 날짜를 잡기 어렵다고 아예 11월로 모임을 앞당겨..

춘천이니까, 시월이니까 - 박제영

춘천이니까, 시월이니까  - 박제영   이 밤이 지나면 해는 짧아지고 어둠은 깊어지겠지기차는 떠나고 청춘의 간이역도 문을 닫겠지   춘천이 아니면 언제 사랑할 수 있을까시월이 아니면 언제 이별할 수 있을까   지상의 모든 악기들을 불러내는 거야사람도 짐승도 벌레도 다 불러내는 거야   이곳은 춘천, 원시의 호숫가발가벗은 가수가 노래하고, 가수가 아니어도 노래하지   지금은 시월의 마지막 밤, 야생의 시간발가벗은 무희가 춤을 추고, 무희가 아니어도 춤을 추지   불을 피우고 피를 덥혀야 해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헤어져야 해   아침이 오면 안개가 몰려 올 테니마침내 시월을 덮고 춘천을 덮을 것이니   사랑해야 해 우리, 춘천이니까이별해야 해 우리, 시월이니까   소통의 월요 시편지 489호 (2016)..

반복 - 신평

반복    - 신평   이제 막 날갯짓 하려는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법을 가르쳐 준다   그 옛날 아버지가 텁텁한 냄새의 입김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똑 같은 방법   아버지와 달리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다     구부려 올려다보는 아들의 어깨 너머   그가 겪어나갈 신산(辛酸)의 세월이 겹겹이 둘러섰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 훨씬 더   세상은 차갑고 무섭단다     내 힘 한 점 소용없을 때까지   네 기력을 돋울 군불이 되고 싶건만     이미 달빛이 된 아버지   나도 곧 달빛으로 오른다   아들은 그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 법 가르치며   그 옛날 자신의 숨결과 닿았던 내 숨결을 기억하리     생의 반복은   엄숙하고 슬픈 되새김이다      - 시집 『산방에서』 (책만드는집, ..

토닥토닥 - 김재진

토닥토닥    -  김재진   나는 너를 토닥거리고너는 나를 토닥거린다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하고너는 자꾸 괜찮다고 말하고바람이 불어도 괜찮다혼자 있어도 괜찮다너는 자꾸 토닥거린다나도 자꾸 토닥거린다다 지나간다고 다 지나갈거라고토닥거리다 잠든다   * 시 감상 : 토닥토닥은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지친 영혼에 전하는 따듯한 위로입니다.어린시절 마음에 생채기가 나면 어머니는 저를 당신의 무릎에 눕게하고 어깨를 토닥이시며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셨습니다. 이제 다시는 그런 위안을 받을 수 없겠지만 그 기억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토닥토닥.... 토닥토닥.... 입으로 되뇌이는 것 만으로도.   오늘, 점심 시간에 대학 동창과 함께 학교 앞에서 식사를 같이 하고, 시원한 커피 숍에 앉아 한참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