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겨울 수화(手話) - 최승권

석전碩田,제임스 2019. 2. 20. 09:57

겨울 手話(수화)

                                            - 최승권

 

몇 몇은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

키 작은 여학생들을 일제히 흐느끼게 할 때

서울 어느 목공소 조수로 취직했다는 광오와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상동이의 얼굴은

금간 유리창 너머 갈매기 두 마리로 날아오르고

교정 구석 단풍나무 한 그루로 선

나는 노을이 지는 바다를 훔쳐보았다.

 

싸락눈 잘게 뿌리던 날

문뜰나루 건너온 그놈들이

조회시간에 불쑥 내민 김뭉치를 받았을 때

지방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정적인 시골 중학교 선생님이 된 나는

그놈들의 부르트고 째진 손등과

교실바닥에 나뒹굴던 해우무침 조각을 보고

바다를 따라 흔들리는 유채꽃의 희망과

황토밭을 흐르는 고구마 줄기의 자유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일까.

 

해우 한 장보다도 얇은 졸업장을 주면서

바닷가 갯물냄새 투성이의 아이들과

마지막 뜨거운 악수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빈 칠판에 갈매기 두 마리를 그리고

유리창 밑에 숨어 바다를 보며 울었다.

 

서울의 낯선 어둠을 깎는 대패질소리와

절망마다 강하게 내리박는 못질소리가

짧은 편지 가득 들려오는데

앨범에 묻어두었던 흑백의 그리움이

문뜰나루 갈매기 울음소리에 섞여

옹암리 앞 푸른 바다로 출렁이는 것을 보았다.

 

- 198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감상 : 매년 이맘 때는 졸업식이 있는 때입니다. 지난 주간에 대부분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졸업식이 열렸고 이번 주에는 대학에서 졸업식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 대학은 매년 222일이 고정되어 있는 학위 수여식날입니다. 아마도 이틀 뒤, 좁은 홍익 와우캠퍼스 교정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졸업을 축하하는 가족들과 친구, 친지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입니다.

 

시인 최승권은 이 시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거의 30년이 지난 후에야 시집 한 권, <정어리의 신탁>(2016년)을 달랑 낼 정도로 그리 활발하게 시작 활동을 하지는 못한 듯 합니다. 그러나 이 한 편의 시로 인해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어느 중견 시인의 고백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이 시를 벽에 붙여 놓고 반복해서 읽으며 가난한 시절을 이겨냈노라 고백도 하는 걸 보면 멋진 시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고등학교 졸업식의 풍경이 많이 달라져 있지만, 이 시가 쓰여질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대학에 진학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졸업하고 곧바로 목공소에 취직하는 아이도 있었고, 또 졸업식 날 고마웠던 선생님에게 김뭉치를 선물로 주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물론 교권이 땅에 떨어지고 학생을 무서워 하는 선생님들이 몸을 사리며 그들이 얼른 졸업해서 나가기를 원하는 작금과 같은 험한 시대와는 달리, 그 때까지만 해도 학생들 하나 하나의 사정에 가슴을 아파하며 숨어서 울어주는 선생님도 계시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제는 모처럼 시 속의 문뜰 나루 풍경과 같이 서울에 흰 눈이 흐드러지게 흩날리면서 내렸습니다. 내리는 눈을 바라 보면서 졸업을 하고 새 출발하는 젊은이들의 앞 길이 순탄하기를 바라는 기도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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