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 고영민 시집 <악어>(실천문학사, 2005년 8월)
* 감상 : 엊그제, 아침 묵상을 받아 보는 지인 한 분이 시 한 편을 보내주시면서 멋진 감상 멘트까지 덧붙여 주셨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삶 속에서 소재를 찾아 콩트 같은 발상과 해학, 풍자를 곁들이는 시로 잘 알려 진 고영민 시인의 시입니다.
밥그릇
- 고영민
밥하던 아내가
포개진 밥그릇이 빠지지 않아
나에게 들고 왔다
한 그릇에 조금 작은 그릇이 꼭 끼여 있다
그릇이 그릇을 품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아픔
당최, 힘주어 당겨도 꼼짝하지 않는다
물기에 젖어 안으로 깊어진 마음
오늘은 저리 꼭 맞았나 보다
한 번쯤 나는 등 뒤에서 너를 안아보고 싶었네
선반 위,
씻긴 두 개의 밥그릇이
봉분처럼 나란하다
p.s
소소한 일상의 한 단면을 삶의 통찰을 통해 아름답게 노래한 작품입니다. 포개진 밥그릇을 보면서 사랑하는 이의 아픔을 헤아리며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웅숭깊습니다. 삶과 죽음을 중의적으로 나타내는 봉분 같은 선반 위 밥그릇을 보며 하루하루을 충실하게 살라고 하는게 아닐런지요. 오늘 저녁 설거지 하는 아내에게 다가가 백허그를 해보는 것은 어떨런지요.
*
그래서 고영민 시인의 시 중에서 재미나는 시 한 편을 더 꺼내 읽다가 그만 빵 터지고 말았습니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는 산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을 맞딱뜨려봤을 것이기에 시를 읽는 내내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로 격한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영민 시인은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악어><공손한 손><사슴공원에서><구구> 등이 있습니다.
70년 대, 재래식 화장실에는 휴지 대신 신문이나 책을 오려 놓은 종이가 사용되곤 했습니다. 책 한권을 갖다 놓으면 족히 한 달은 충분히 사용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페이지들이 찢겨 나갔지요. 그리고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찢은 후 구기고 구기고 비비고 했던 기억...
한 권의 시집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고뇌하고 쓰고 또 쓰기를 반복한 끝에 탄생 된 시의 운명을 알기에, 시인은 시집을 찢는 행위가 그저 그런 평범한 책을 찢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 듯, '무례하게도 찢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찢은 페이지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구기고 구기는 행위, 그리고 그 부드러워진 것으로 똥구멍을 슥 닦는 행위를, 독자로 하여금 적나라하게 상상하게 만드는 시인의 능력은, 너무도 탁월합니다. 결국 시인이 각혈 하듯이 받아 놓은 시 한 편 한 편은 수없이 곱씹어서 부드러워진, 찢어진 삶의 고통이 담겨져 있는 산물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똥구멍으로 무엇인가를 읽어 본 적이 있는가요? 아니, 질문을 달리해야겠네요. 여러분은 수없이 많은 반복 손질을 한 끝에, 부드러워진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 본 적이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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