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아내의 정부 - 문동만

석전碩田,제임스 2018. 12. 28. 15:48

아내의 정부

 

- 문동만

 

다시 저 사내

아내는 아파 드러누웠고 잠시 아내의 동태를 살피러 집에 들른 것

어떤 남자가 양푼에 식은밥을 비벼 먹다가

그 터지는 볼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 그렇지 오랜 세월

아내의 정부였다는 저 남자 늘 비닐 봉다리를 가방처럼

들고 다니며 옛 여자의 냉장고를 채워주는 게 업이라는 사람

평생 조적공으로 밥을 벌어먹었고

시멘트가루 탓인지 담배 탓인지 목구멍에 암 덩어리를 달고서야

일도 담배도 놓았다는 저 사내

늘 성실했으나 사기꾼들에게 거덜났던 사내다 아픈

옛 여자를 위해 공양인 양 쌀죽을 쑤어 바치고

잔반을 털어 비벼 늦은 점심을 때우고 간다 온다 말없이

문을 잠그고 돌아가는 이 오래보는 삽화의 주인공

나도 이 한낮 그처럼 쓸쓸하여 그가 앉았던 식탁을 서성거린다

개수대는 밥풀 하나 없이 말끔하고 아내는 잠 깊고 그러니

나는 사랑의 무위도식자로 그 행적에 질투하며 순종하고 마는데

그가 되돌아가는 긴 내리막길에 삐걱거리는 뼈마디에

가벼운 보자기에 순종하고 마는데 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아내의 정부! 이 딴 순애일랑 내 못 본 체 할 것이니

오래오래 두고두고 즐기시지

 

- 시집그네(창비, 2009)

 

* 감상 : 1969년생 충남 보령 출신, 1994<삶 사회 그리고 문학> 창간호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시집으로 <나는 작은 행복도 두렵다>, <그네>가 있는 시인입니다.

 

이 시를 읽다보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 보이는 듯 합니다. 화자(話者)인 시인이 몰래 지켜보고 있는 광경, 그 화면 속에는 남루한 한 사내가 병으로 누워있는 한 여자에게 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하고는 몰래 사라지는 장면입니다. 시의 제목에서 힌트를 주듯이 바로 아내의 정부(情夫)’가 수년 간 내 대신 아내를 위해서 사랑을 쏟아놓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시입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읽어보면 이 광경을 바라 보고 있는 화자인 시인과 화면 속의 정부(情夫), 즉 그 사내는 시적인 동일체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서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먼저, 이 광경이 바로 자신이 오래 봐 온 삽화의 주인공이라고 슬쩍 표현하면서 그 삽화의 주인공이 앉았던 자리를 서성거리는 나를 묘사하는 대목입니다.

 

나도 이 한낮 그처럼 쓸쓸하여 그가 앉았던 식탁을 서성거린다로 시작하는 역할바꿈이 바로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결국 아내의 정부는 다름 아닌 시인인 화자 자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시이면서, 또 병든 아내를 돌보는 시인의 순애보적(譜的)인 사랑을 그린 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힘들지만, 오래 오래 두고 두고 그 사랑을 계속하리라는, ‘끝까지사랑하리라는 결심이 읽혀지는 시입니다. 도발적인 시 제목 때문에 괜히 불편한 심기였다면, 마음 푸시고 이 시대에도 이런 순애보적인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오히려 위안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저녁, 긴 신혼여행에서 돌아 온 아들 내외와 온 가족이 행복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부부란 결국 '에로스 사랑'으로 시작해서 끝까지 함께 가는 '아가페 사랑'으로 끝나야 하는 참 희한한 사이(관계)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아들 부부가 오래 오래 두고 두고 순애(純愛)를 즐기는 사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