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픈 사랑
- 류 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 시집『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 감상 : 일요일 저녁, 9시 뉴스가 끝나자마자 한 시간 동안 하는 KBS의 <역사 저널 그 날> 프로그램은 언제나 저를 TV 앞에 붙들어 놓습니다. 지난 2013년에 시작된 프로그램이니 그동안 족히 5년 간은 빼놓지 않고 일부러 그 시간을 기억하고 시청한 것 같습니다. 바로 그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는 류근 시인의 시입니다.
1966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북 충주에서 자랐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그리고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그 이후 작품 발표를 전혀 하지 않다가 등단 18년만인 2010년 ‘상처적 체질’(문학과 지성 刊)을 첫 시집으로 출간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광고회사 등에서 일하다가 홀연 인도 여행을 하고 돌아와 강원도 횡성에서 고추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대학 재학 중 쓴 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가수 故 김광석에 의해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류근 시인은 군 복무시절 사귀던 여자를 선배에게 빼앗긴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전방 GOP 근무를 하면서 아침이면 매일 ‘오늘은 죽어야지’ 결심했다가 저녁노을이 밀려오면 ‘하루만 더 살아보자’ 마음 고쳐 먹기를 몇 번을 거듭했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에는 당시 쓰라린 사랑의 실패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듯, ‘먼 전생에’ 그가 쓴 ‘유서’로 남았다고 독백하는 그의 음성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아픔을 경험하게 되는 사랑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고 있는 시여서 그런지 절절한 아픔이 묻어나는 시입니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인기를 모으면서, 온라인에서 유명해 진 그는 그동안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을 모아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라는 산문집도 낼 정도로 이제는 세상과 소통하면서 사랑으로 상처받은 영혼들을 보듬는 TV 출연 인기 시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래 전 청년 시절, 실연을 한 후 울면서 자기 마음을 토로했던 교회 친구의 말이 새삼 기억납니다.
“그동안 세상에 있는 유행가 가사들이 너무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것 같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 가사들이 다 나를 위해서 쓰여 졌고 나를 위해서 만들어 진 듯 내 마음을 어찌 이리도 잘 위로하고 이해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CCM이나 찬송가 뿐 아니라 유행가 노래 가사나 이런 통속적인 시도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능력이 있으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에 누워 - 박해수 (0) | 2019.02.01 |
---|---|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0) | 2019.01.17 |
아내의 정부 - 문동만 (0) | 2018.12.28 |
다시 누군가를 - 김재진 (0) | 2018.12.20 |
무소유 - 백무산 (0) | 2018.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