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
- 문우순
전기톱 든 인부들이
고사한 은행나무 밑동을 베고 있다
일생의 속살 깊이 파고드는
강고한 톱날에
이제 무엇을 그리워하고 아파하랴
생명줄 놓고 그만 쓰러지고 마는 은행나무
밑동에 남은 나이테가
경련하듯 파문을 그린다
제각각인 파문의 간격
힘들게 살아 온 자취 역력하다
내 나이테에도 저런 자취 역력하리
삶이란 하나씩 원을 그려가는 것
토막 난 은행나무 나이테 위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 인간과 문학(2019 봄, 제25호), 시 부문 신인추천 당선작
* 감상 : 이 시를 쓴 시인은 저희 가족과 매 주일, 합정동 100주년 기념 교회 같은 예배실에서 나란히 앉아 예배드린 지 벌써 햇수로 10년이 되어 가는 문우순 권사님이십니다. 예전에 다녔던 교회에서부터 같이 예배를 드려왔으니, 족히 30년은 더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권사님께서 직접 시를 쓰고 또 이렇게 계간 문예지에서 추천 작가로 등단할 정도로 시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는 미쳐 몰랐습니다.
4주 전, 서울에 때 아닌 함박 눈이 흩날리던 날 '오늘은 외출하지 말고 집에 있으시라'는 자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섰다가 낙상 사고를 당해 교회 예배도 빠졌는데, 4주만에 다시 교회 출석을 한 지난 주일 예배 후, 아직도 불편한 손으로 불쑥 내민 책 한 권, 그리고 시 다섯 편. 그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수명이 다해 넘어 진 은행 나무가 인부에 의해 잘려 나가는 광경을 보면서, 삶의 회한을 잔잔하게 노래한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깊은 관찰력이 참으로 돋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적 은유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 긴장감을 유지하는 능력이 너무도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강고한 톱날', '경련하는 파문', 그리고 '제각각인 파문' 등의 표현들은 지금까지의 인생 여정이 결코 쉽지 만은 않은, '힘들게 살아온 자취가 역력한 그 자체'임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 삶의 자취인 나이테 위에, 하얀 눈이 내리면서 덮어주는 시적 은유는, 그녀가 이제는 은혜와 용서의 삶 속에서 남은 삶을 살아가길 소원하는 마음이 묻어나는 듯 합니다.
작년 이맘 때, 홍익대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고(故) 문우식 교수의 작품전에서 여동생인 문우순 권사님 가족 모두를 만났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역시 예술가의 집안은 그 DNA부터가 다른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석전(碩田)
http://blog.daum.net/jamesbae/13410613
* 이곳을 클릭하시면 문우식 전시회 관련 글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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