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친다는 것
- 박선희
새로 사 온 시집을 넘기다가
종잇날에 손가락을 베었다
살짝 스친 것도 상처가 되어
물기가 스밀 때마다 쓰리고 아프다
가끔은
저 종잇날 같이 얇은 生에도
마음 베이는 날
그 하루, 온통 붉은 빗물이 흐른다
종잇날이 스치고 지나간 흔적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모두 상처다
나와의 만남도 상처며
나와의 헤어짐도 상처다
무딘 날에 손 베인 적 있던가
무덤덤함에 마음 다친 적 있던가
얇은 것은 상처를 품는다
스친다는 것은 상처를 심는 거다
- 계간 『부산시인』 봄호
* 감상 : 시인에게 어떻게 시인이 되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답이 비슷비슷하더군요. 그 대답은 '어느 날 문득 시가 내게로 왔다'는 것입니다.어느 날 문득 시가 스스로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1960년, 부산에서 태어난 박선희 시인은 자신을 소개하는 표현으로 '바다가 아름다운 부산에서 태어나 1999년 <시와 사상>으로 등단'했다는 간단한 멘트 이외에는 별로 없습니다. 그녀의 첫 번째 시집인 <여섯째 손가락>과 두번 째 시집 <사람거울>(문학의 전당)이 발간되면서 그 이력을 더한 것 이외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입니다.
삶 속에서 공감되는 짧은 글을 담은 <아름다운 편지>글을 오랫동안 써 오면서 내공이 깊어진 그녀에게 어느 날 문득 시가 찾아 왔습니다. 하필이면 새로 산 시집을 넘기다가 종잇날에 손가락을 베인 그녀가 '베임' '상처'에 대해 삶의 교훈을 얻는 과정이 바로 시인이 되어 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인 손가락이 쓰리고 아픈 것을 경험하며 그녀는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모두 상처다/ 나와 만남도 상처며/ 나와의 헤어짐도 상처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녀를 아프게 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것', '얇은 것'들이었습니다. 온통 마음에 붉은 빗물이 흐르게 하는 것도 얇은 종잇장 같은, 스쳐지나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저 스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청국장 같은 진중하고 무덤덤한 깊은 맛이 나는 만남이 아쉽지만, 오히려 시인에게는 그 상처가 시를 만들고 시가 오는 길목입니다.
억지로 시를 만들지 않고, 그저 생활 속에서 시인에게 찾아온 시를 충실하게 받아 적은 듯 편안하게 읽혀지는 그녀의 시이지만 그 속에는 큰 울림이 있습니다. 아픈만큼 성숙해져서 이겠지만 얇고 그저 스치는 것보다는 무디고 무덤덤함이 그리운 아침입니다.-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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