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선운사에서 - 최영미

석전碩田,제임스 2019. 4. 4. 09:11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 비평사, 1994)


* 감상 : 1961년 생. 선일여고, 서울대 서양사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1992[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래 대담한 발상과 세련된 유머, 자본과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첫 시집을 발간, 무려 50만부가 팔리며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에 올랐습니다.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 <도착하지 않은 삶>, <이미 뜨거운 것들> 이외에 소설도 몇 권이 있습니다.  

 

봄 꽃이 만발하는 이맘 때 쯤이면, 송창식의 '선운사에 가 본적이 있나요?'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바람불어 설운 날에 동백꽃이 눌물처럼 후두둑 지는 선운사.  

 

아마도 시인도, 이렇게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에 힘들게 힘들게 핀 꽃을 만나려고 서울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 내려 갔나 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화사하게 나를 맞아 줄거라고 예상했던 꽃은 이미 져서 가까이에는 어디에도 없고 멀리서 웃는 님처럼, 산 넘어 가는 님처럼 잠깐도 흔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힘들게 피었다가 쉽게 져 버리는 동백꽃의 속성을 빌려, 이제는 이별한 사랑을 가슴 아프게 노래합니다. 아쉬움에, 이제는 떠난 님에 대한 그리움도 꽃이 잠깐이면 지는 것 같이 잊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드러냅니다. 그러나 잊으려 하면 할 수록, 영영 잊혀지지 않는 '한참'이니 이 어찌하랴.  

 

작년, 문단의 대 선배 고은 시인을 '괴물'로 지칭, 미투 운동을 촉발했던 최영미 시인의 시 한 편으로 온 천지 봄 꽃으로 화려한 이 즈음, 잠깐 있다 져 버릴 꽃이지만 화사한 봄 꽃 세상을 온 몸으로 맞이 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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