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섬진강 나들이 - 안용태

석전碩田,제임스 2019. 4. 18. 06:33

섬진강 나들이   

 

- 안용태  

 

소풍간다  

벽진국민학교 사십회 동기생들  

졸업하고 사십년만의 나들이다.  

자식새끼 키운다고  

남해 고속도로 들머리 산불처럼 벗겨지거나 숯이 된 가슴  

번데기 된 누에처럼 반백 년 지어 놓은   

고치를 풀어 한이든가 눈물이든가  

쌍계사 가는 길 섬진강에 풀어 본다.  

늦봄, 꽃은 지고  

꽃 진 자리가 아파 피멍든 벚꽃나무 바라보며  

전라도와 경상도 아우르는  

화개 장터를 피 토하듯 게워낸들  

어디 한번 간 청춘 다시 오겠냐만  

시샘할라치면 명줄 긴 나무는 천년을 살아도  

반백년 비바람에 옥자야, 질호야 이기 뭐꼬  

잘 익은 참외처럼 우리네 얼굴   

강물 같은 깊은 주름   

분칠로 지우려 성형을 지우려 낙망 말아라.  

저기 저 절집 삼나무처럼 우리네 아이들 사철 푸르지 않으냐  

오늘은 다 벗어 두고 술이나 마시고 노래나 부르자  

여즉 고생 많이 했다 아이가.  

 

- <하늘> 2005년 여름호, 시집 <몽돌>(학이사, 2012)  

 

* 감상 : 안용태 시인은 1952년 나의 고향 경북 성주에서 출생했습니다. 2000<해동문학>으로 등단, 계간 <하늘>사무국장,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대구시협 회원으로 활동하며 2012년 첫 시집 <몽돌>을 발간, 대구 만촌동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그의 시를 읽으면 '나의 고향 성주'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어(詩語)들에 정겨움을 갖게 됩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이 같은 산천이고, 그로인해 동질의 추억을 지녔으며 옥자, 질호와 같은 고향에서는 너무도 익숙한 이름들, 그리고 '참외의 주름'과 같은 특산품 향기나는 표현 하나에까지 정감이 가기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읽은 시는 동창들끼리 나들이 다녀온 후 밴드나 SNS 공간에 후기 정도로 올릴만 한 너무도 평범하게 읽힐 수 있는 수필 같은 시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도 단순합니다. 50대 초반의 중노가 되어 동창들끼리 섬진강 나들이(소풍)를 가는데, 이런 저런 삶 속에서의 스트레스는 다 내려 놓고 이 날 만큼은 술 마시며 한번 맘껏 놀아보자는 단순한 내용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시가 시적인 긴장감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데 시인의 탁월함이 있습니다여기에 등장하는 '섬진강' '벚꽃' '화개장터' 등은 사실 시인이 말하려고 하는 바로 이 단순한 내용을 말하려는 데 하등 상관없는 소재들일 수 있습니다.


화려했던 벚꽃이 진 자리를 '아파 피 멍든 자국'으로, 그리고 관광 버스 안에서 조영남의 화개장터 노래를 목청껏 불러젖히는 상황을 수채화처럼 그려내는 시적(詩的) 기교는 일품입니다. 또 고향 냄새 물씬 나는 사투리, '여적 고생 많이 했다 아이가'로 시를 마무리하는 여유는 백미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초등학교 동창 녀석 하나를 먼저 하늘 나라로 보냈습니다. 불과 지난 해 여름, 함께 술잔 기울이며 나이 들어 가는 걸 아쉬워했던 친구였는데 말입니다. 허허로운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고향 산천을 노래한 시인의 시로 이렇게 마음을 달래 봅니다. 지금은 그 때 그 오래 된 벚나무는 다 베여지고 없지만, 늘 봄이 되면 소풍을 갔던 내 고향 성주 '양정'의 벚꽃이 그리운 날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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