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느슨해진다는 것 - 이정록

석전碩田,제임스 2019. 4. 25. 06:48

느슨해진다는 것  

 

- 이정록   

 

병원에서 돌아와 보니,  

뒷간에 기대 놓았던 대빗자루를 타고 박 덩굴이  

올라갔데. 병이라는 거, 몸 안에서 하늘 쪽으로 저렇듯 덩굴손을 흔드는 게 아닐까. 생뚱맞게 그런 생각이 들데. 마루기둥에 기대어 박꽃의 시든 입술이나 바라보고 있는데, 추녀 밑으로 거미줄이 보이는 게야. 링거처럼 빗방울 떨어지는 거미줄을 보고 있자니, 병을 다스린다는 거, 저 거미줄처럼 느슨해져야 하는구나. 처마 밑에서 비를 긋는 거미처럼 때로는 푹 쉬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데. 달포 가까이 제 할 일 놓고 있는 빗자루를, 그래 너 잘 만났다 싶어 부둥켜안은 박 덩굴처럼, 내 몸에도 새로이 핏줄이 돌지 않겠나. 문병하는 박꽃의 작은 잎술을 바라보다가, 나 깊은 잠에 들었었네 그려.  

 

비가 오니 마누라 생각이 간절해지는구먼.  

부침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말이여.  

참 자네 안사람이랑 애들은 다 잘 있는감  

그리고 말이여, 제수씨 밀가루 다루는 솜씨는 여전헌가.

 

- 시집 <제비꽃 여인숙>(민음사,2001)   

 

* 감상 : 이정록 시인은 1964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공주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문학동네, 1994>, <풋사과의 주름살, 문학과 지성사,1996>,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문학과 지성사, 1999>, <제비꽃 여인숙, 민음사, 2001>,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문학동네, 2004>, <의자, 문학과 지성사, 2006> 등이 있습니다. 2001년에 김수영 문학상을, 2002년에는 김달진 문학상, 2006년에는 제26회 소월시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천안농고 한문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단국대, 고려대에서 시 창작 강의도 한 적이 있습니다.  

 

시를 읽으면, 마치 흑백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보는 느낌이 듭니다. 그것도 내레이션은 전혀 없고 그저 화면만 열심히 돌아가는.  

 

마도 시인은 한 달 반이나 되는 꽤 긴 시간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여 시골 집에 돌아 온 듯 합니다. 병원에 가기 전에는 없었던 거미줄이 걸려 있고 그 거미줄에 내리던 봄비가 걸려 떨어지는 모습이 조금 전까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링거 방울이 내 몸 속으로 똑똑 들어가는 모습과 닮았습니다. 그 떨어지는 속도와 비슷하게, 뒷 간에 비스듬히 세워 둔 대빗자루를 부둥켜 안고 올라가는 박 넝쿨의 모습이, 얼핏 보면 정지되어 있는 듯 하지만 그 새 저 만치 올라간 걸 보면, 느슨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생명의 끈질김을 느끼게 합니다.  

 

런 시적 은유를,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통화하는 후배와 꿈 속에서 이야기하는 상황과 버무려 표현해 낸 시가 바로 오늘 우리가 감상하는 시입니다.  

 

난해 늦 가을, 갑자기 찾아온 <망막박리>.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안과 질환을 치료하느라 큰 수술을 하고 또 요즘은 삼겹살을 먹다가 오도독뼈를 잘못 씹는 바람에 치과 치료를 하느라 열심히 병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어금니가 보기 좋게 십자로 금이 가서, 신경 치료 후에 이빨을 덮어씌워야 한다는 진단입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드는 생각은, ‘어느 날 졸지에찾아 온 병이, 내 잘 못도 아니고 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그저 삶의 길에서 만나는 복불복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종교적인 해석으로, 내가 죄가 많아서 이런 병이 찾아 온 건 더더욱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저 감사한 것은 이런 병이 생겼을 때 즉시 병원에 달려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옆에서 돌봐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입니다  

 

인도 원치 않는 병을 얻어보니, 지금까지 급하게 달려 온 삶의 모습이 너무도 빡시고 바빴다는 것, 그리고 먼저 간 아내에게 살갑게 못해 준 것도 그리움이 되어 생각난 듯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느슨하게, 비 오는 날에는 막걸리 한 잔 마시며 살아가는 얘기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 속 결심이 엿 보입니다. 그저 같은 하늘 아래 동시대인(同時代人)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부둥켜 안아주고 싶은 그런 마음 말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