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테크
- 안도현
한 평 남짓 얼갈이배추 씨를 뿌렸다
스무 날이 지나니 한 뼘 크기의 이파리가 몇 장 펄럭였다
바람이 이파리를 흔든 게 아니었다, 애벌레들이
제 맘대로 길을 내고 똥을 싸고 길가에 깃발을 꽂는 통에 설핏 펄럭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
동네 노인들이 혀를 차며 약을 좀 하라 했으나
그래야지요, 하고는 그만 두었다
한 평 남짓 애벌레를 키우기로 작심했던 것
또 스무 날이 지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나는 한 평 얼갈이배추밭의 주인이자 나비의 주인이 되는 것
그리하여 나비는 머지않아 배추밭 둘레의 허공을 다 차지할 것이고
나비가 날아가는 곳까지가, 나비가 울타리를 치고 돌아오는 그 안쪽까지가
모두 내 소유가 되는 것
- <작가세계> 2008년 여름호
* 감상 : 오래 전, 안도현 시인의 짧은 시 <너에게 묻는다>를 우연히 접하고 짜릿한 전율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연탄재’라는 제목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 시였습니다. 아마도 이 시를 읽은 후 시라는 문학 장르가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년, 문학동네)
안도현 시인은 1961년 12월 15일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고 대구 대건고, 원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중등학교 교사로 교직의 길에 들어섰지만, 당시 전교조 사건에 휘말리면서 6년 여 해직교사가 되었습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과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각각 '낙동강',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시로 당선,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100여권이 넘는 시집을 낸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감상하는 시 <재테크>는 아마도 시인이 1997년 전업시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시골 어디 쯤에 자리를 잡고 텃밭을 가꾸면서 벌어진 상황을, 당시 온 나라에 불고 있는 땅 투기, 아파트 투기, 복 부인 등 재산 늘리는 게 인생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사회 분위기를 은근히 풍자하고 고발하는 내용으로 노래 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골몰하고 있는 재테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거꾸로 달리는 재테크를 하는 바보 시인의 ‘감성 재테크’가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요?
1996년, 지금 살고 있는 연남동 집을 마련하면서 가장 먼저 고려했던 것은, 시골 생활을 하시다가 상경한 부모님이 한 뼘이라도 땅을 밟을 수 있는 단독주택이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서울에 와서 처음 어렵게 사귄 동네 분들인 연희동 이웃과 가급적 가까운 곳이면 좋겠다는 것 등, 재테크와는 아무 상관없는 기준으로 집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가끔씩 용산역과 가좌역을 오가는 화물열차가 한번씩 지나갈 때면, 온 동네가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는, 후진 동네가 바로 연남동이었지요. 그런데, 23년이 지난 오늘 날, 시인이 꿈 꾼대로 그 때 집 마당에 핀 꽃에 앉았던 나비가 날아 올라 지경을 넓혔는지, 아니면 먼저 가신 부모님께서 꽃 피는 계절에 쉬고 싶어 오시려고 마련하신건지, 철길이 근사한 공원이 되어 집 앞 뜰이 되었습니다.
동네 노인들이 혀를 차며 약을 좀 하라 했으나 ‘그래야지요’ 하고는 그만 두는 시인의 '우직한 거꾸로 재테크'야말로 최고의 재테크임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비록 세상을 좇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여간 고집스럽고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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