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와 싸우다
- 정일근
내 시작의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
시를 퇴고할 때 조사는 추려내는 것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이 시의 첫 문장
<내 시작의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를 두고도
나는 오랫동안 고민할 것이다
<의>라는 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시작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로 고치거나
<를>이란 조사가 불편하면
<내 시작의 버릇 하나 말하자면>으로
고칠 것이다, 그 두 문장을 두고
밀고 당기고 여러 날을 끙끙거릴 것이다
이 버릇은 사실 조사와 싸우는 일
지난 여름에는 시집 한 권을 묶으며
시 속에 별처럼 뿌려진 조사와 싸웠다
<은> <는> <이> <가> <을> <를> 을
죽였다 살렸다, 살렸다 죽였다
만나는 조사마다 시비를 걸며 싸웠다
시를 노래하는 것은 하늘의 일이고
시를 다듬는 것은 사람의 일인지라
반복되는 노역에 몸져눕기도 했는데
가까이 지켜보던 아내가 웃는다
당신이 무슨 부처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냐, 며 웃는다
어이쿠! 답은 그 속에 있었구나
나는 전생에 부처 공부하다 만 땡초였는지
그놈 조사와 이렇게 싸우는구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도 베라고 했으니
나를 죽이는 일은 나를 살리는 일이다
조사를 죽여 시를 살리지도 못하면서
나는 죄 없는 조사와 싸우고만 있다
어디 보자, 이 시 속에도
시비 거는 조사 몇 놈 있을 것이니
나는 또 죽였다 살렸다 할 것이다
- <실천문학> (2003년 겨울호)
* 감상 : 정일근 시인은 1958년 7월,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으며 경남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1984년 <실천문학>에 ‘야학일기’ 등 7 편의 시를 발표했고,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라는 시로 당선, 등단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중등학교 국어교사와, 그리고 문화일보와 경향 신문 등 사회부 기자로도 활동하는 등 울산 및 경남 지역에서 사회적인 활동에도 적극적인 시인이며 작가입니다. 현재는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1987),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1991),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1994), <처용의 도시>(1995), <경주 남산>(1998),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2001).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2003), <오른손잡이의 슬픔>(2005),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2006),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2009), <방!>(2013), <소금 성자>(2015) 등이 있으며 동화집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에요>(2014) 등 4권이 있습니다.
적어도 정일근 시인의 ‘조사와 싸우다’는 제목의 이 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 조사(祖師)라는 말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듯 합니다. 갑자기 땡초와 전생의 부처가 왜 뜬금없이 나오는지, 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도 베라는 불교의 가르침과 ‘싸우다’라는 시적 은유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면 훨씬 더 시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 부처님 오신 날을 보내면서 간단하게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조사(祖師)에 대한 설명으로 불교 공부를 먼저 하는 시간을 가져 보겠습니다.
[조사(祖師) : 후세 사람들의 경외와 존경을 받을 만한 승려이거나 1종 1파를 세운 승려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다. 특히 선종에서 조사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넓은 의미에서는 절을 창건한 사람까지 포함시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선종에서는 종파를 초월하여 인도의 27조사와 중국의 6조사를 합한 33조사를 가장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33조사 중에서도 달마대사(達磨大師)와 육조 혜능대사(六祖慧能大師)를 가장 신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종의 조사로는 신라 말기의 도의(道義)를 비롯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주, 고려시대의 보조국사(普照國師)·보우(普愚)·나옹(懶翁), 조선시대의 휴정(休靜) 등을 꼽고 있다. 교종에서는 자장(慈藏)·원효(元曉)·의상(義湘)·의천(義天) 등이 대표적인 조사로 꼽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는 조사당(祖師堂)을 건립하여 이들 조사의 영정 등을 봉안하며, 역대 조사를 공양하는 법회인 조사회(祖師會)를 가지기도 한다.]
이쯤되면, 시인이 날마다 조사(助詞)와 싸우는 것과 범생인 우리를 비롯하여 도를 닦는 모든 고승들이 날마다 자기와 싸우는 것이 하나의 시적 은유로 연결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남의 글을 편하게 읽을 때와 자기가 직접 글을 쓸 때가 얼마나 다른 지를 압니다. 한 문장을 쓰더라도 몇 번의 퇴고와 수정, 그리고 토씨(조사) 하나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서 최종 문장이 완성되는 과정이 마치 싸움과도 같습니다. 특히, 시를 쓰는 일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토씨(조사)와 싸우는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재미나게 설명했습니다.‘반복되는 노역에 몸져눕기도 했다'는 그의 진술은 시인들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고 또 싸우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어쭙잖게 시를 쓰느니 이렇게 매 주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독자의 입장이 훨씬 부담없이 그들의 노고를 즐길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 매주 목요일에 올리던 시를 수요일에 포스팅했더니 어느 후배님 한 분이 요일을 밝히지 않으면 수요일이든, 목요일이든 아무 상관없이 얽매이지 않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멋진 제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월요일 아침 이 시를 올리는 마음, 부담이 전혀 없네요.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시를 소개한다고 누가 시비 걸면 죽였다 살렸다 싸우지는 말야겠지요? ㅎㅎㅎ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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