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맞는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
욕타임
- 손 세실리아
오천 평 농장일도 척척
중증 치매환자인 시아버지 병수발도 척척
종갓집 외며느리 역할도 척척인 여자가 있다
곱상한 외모와 왜소한 체구만 보면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 것 같은데
일일 노동량이 상머슴 저리 가라다
그 정도면 신세한탄으로 땅이 꺼질 법도 한데
볼 때마다 환하다 생색내는 법 없다
한술 더 떠 범사에 감사해한다
슬쩍 비결을 물었다
궁금하나? 하모 내만의 비법이 있재 내도 인간인데 와 안 힘들겠노 참다참다 꼭지 돌면 똥차로 냅다 뛰는 기라 거기서 싸잡아 딥다 욕을 퍼붓는 기지 나가 느그 집 종년이가 뭐가 떠받들어도 살지 말찐데 주둥이만 열믄 뭔노무 불만이 그리 많노? 그리 잘하믄 늬 누이들이랑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하지 와 내한테 미루는데? 욕만하는 줄 아나? 쏙이 후련해질 때까정 고함치고 삿대질도 한다카이 그라고나믄 뭍으로 유람 댕겨 와 해가 중천인 줄도 모리고 디비 자빠져 잠든 띠동갑 황소고집 서방도 불쌍코 공주행세하는 시엄씨도 불쌍코 정신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문서란 문서 거머쥐고 호령하는 시아배도 불쌍코…… 뭣보다도 쉰 넘은 나이에 체신머리 읎게 욕이나 씨부려쌌는 내 드러븐 팔자도 불쌍코
감귤밭 터줏대감 늙은 개도 꼬리 내리고 납작 엎드려 잠자코 들어준다는
- <꿈결에 시를 베다>(실천문학사, 2017)
손 세실리아. 1963년 2월13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2001년 문예지 <사람의 문학>,<창작과 비평> 등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 각종 매체에 산문과 시를 발표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소통을 누구보다도 중시하는 그녀는 몇 년 전 제주도 조천읍에 <시인의 집>이라는 공간을 마련하고 정착했습니다. 다 쓰러져 가는 폐가를 살려 소통의 공간으로, 바다로 넓은 창문이 열린 책방을 연 후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있는데, 그 덕분에 저도 시인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산문집 <그대라는 문장>을 통해 그녀를 만났고 작년 이맘 때, 일부러 시인의 집을 찾아 왔지요.
시집으로 <꿈결에 시를 베다>(실천문학사, 2017), <기차를 놓치다>(애지, 2015)가 있으며, 자서전적인 산문집 <그대라는 문장>(삶이 보이는 창, 2011)이 있습니다.
화려한 등단을 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대표시가 많은 시인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녀의 시가 중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탓일 것입니다. 네이버 블로그, <시인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시인은 “시가 죽었다!”라는 평설에 “과연 그럴까?”문제 제기를 하며 소박하고 나직나직하지만 깊이 있는 진정성으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문인들의 홈페이지나 블로그가 대부분 본인의 작품과 글을 중심으로 꾸며지는 데 반해 손 시인은 ‘고봉밥이 되는’ 시와 소설을 꾸준히 찾아 읽고 소개하면서 문학으로의 폭넓은 관심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시인의 집 책방에는 시와 소설집이 가득한데, 모두 저자의 친필 싸인이 담긴 책들입니다. 저자의 싸인이 있으니, 안 팔리면 다시 출판사로 반품도 할 수 없습니다. 그녀에 의하면 ‘이 일은 가난해도 곁길로 새지 않고 시라는 한 우물을 파고 있는 시인들을 아끼는 지극한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오늘 읽은 시는, 제주에 정착하면서 그녀가 만난 제주 사람의 풋풋한 살아가는 이야기를 시로 담아낸 것입니다. 뭍, 그것도 경상도 어느 지방에서 시집와서 척박한 제주도 인심과 맞서 살아 온 종갓집 외며느리의 삶의 비결을 풀어 놓은 시를 읽다보면 서당 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늙은 개도 다소곳이 들어 줄 만한 삶의 온기가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풀어내지도록 차분하게 들어주는 시인의 모습이 상상되는, 그래서 치유자로서 또는 상담자로서 잘 경청하는 시인이 그려지는 시입니다. 그녀의 모든 시가 바로 이런 삶의 맛을 느끼게 해 주는,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시들입니다.
제주의 바람에 귤꽃 향기가 묻어 있어 너무도 맛있는 바람이 부는 아침입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습니다. - 석전(碩田)
* 아래 사진은 토요일 오후, 서울로 돌아오기 전 잠시 들렀을 때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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