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스쳐보낸 뒤에야 사랑은
- 복효근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산길에선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정상이 어디냐 물으면
열이면 열
조금만 가면 된단다
안녕하세요 수인사하지만
이 험한 산길에서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
반갑다 말하면서 이내 스쳐가 버리는
산길에선 믿을 사람 없다
징검다리 징검징검 건너뛰어
냇물 건너듯이
이 사람도 아니다 저 사람도
아니다 못 믿겠다 이 사람
저 사람 건중건중 한 나절 건너 뛰다보니 산마루 다 왔다
그렇구나, 징검다리 없이
어찌 냇물을 건널 수 있었을까
아, 돌아가 껴안아주고 싶은,
다 멀어져 버린 다음에야 그리움으로 남는
다 스쳐보낸 뒤에야 사랑으로 남는
그 사람 또 그 사람......
그들이 내가 도달할 정상이었구나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이 산길에 나 하나를 못 믿겠구나
- 시집 <목련꽃 브라자>
* 감상 : 복효근 시인은 1962년 남원에서 태어났으며 전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나와 평생 국어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면서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시를 쓰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유머 넘치는 시를 써 오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시가 교과서에 여러 편 실렸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1991년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고 1995년에는 편운문학상 신인상, 2015년에는 신석정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시집으로는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버마재미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어느 대나무의 고백>, <마늘촛불>, <따뜻한 외면>, <그 눈망울의 배후> 등 다수가 있습니다.
산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오늘 읽은 시가 100% 공감이 갈 것입니다. 그만 포기하고 싶고 여기서 그만 돌아가고 싶은데, 저만치 위에서 내려 오는 등산객이 있어 말을 건넵니다. 얼마나 남았냐고. 그런데, 한 참 전에 만났던 사람의 대답이나 지금 만나는 사람의 대답이나 매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다 왔다’고.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입니다.
몇 해 전, 산 정상을 올랐다가 9부 능선 쯤을 내려 가는데 한 무리의 산행객이 힘들게 마지막 고비를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일행 중 리더 격인 사람이 뒷 사람에게 다 왔다고 격려를 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본 순간은 그 말이 있었던 바로 다음이었던 모양입니다. 뒤에서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면서, 내려 가는 우리 일행과 앞서 있는 리더를 향해서 악에 받쳐서 욕을 하는 표정이, 저는 아직도 잊혀지질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봤습니다.
‘사기치지 마! 씨발놈아!’
얼마나 힘들었으면,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정상이라고 말하는 자신의 리더에게 저런 험악한 표정으로 욕을 할까 싶기도 했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얼마나 자주 저 말을 들었을까 싶어 안쓰러웠지요. 진짜 조금만 가면 되는 지점이었거든요.
아마도 오늘 시에서 시인은 그 정도의 욕을 하고 싶었지만, 시인이니까 점잖게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마음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안녕하지 못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 길 같은 삶의 길에서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못 믿을 사람이라고 건성 건성 건너뛰는 자신의 삶의 마음 자세를, 냇물을 건너기 위해 놓여 있는 징검다리 이미지와 연결하는 시적 상상력이 탁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깨달은 삶의 지혜 하나, 수없이 못 믿을 사람이라고 했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사랑해야 할, 껴 안아주고 싶은 귀한 사람이었고 내가 도달해야 할 정상이었다고. 내가 건너 온 삶의 시냇물 건너게 해주었던 징검다리 같은 사람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아쉬움이여! 이 삶의 산 길에서 못 믿을 사람은 바로 나였구나.
복효근 시인의 시는 이처럼 평범한 삶의 순간들에서 건져 올리는 시어들이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때로는 빙그레, 때로는 배꼽을 잡으면서 웃게 하는 해학이 넘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내친 김에 그의 시를 하나 더 소개해 봅니다. - 석전(碩田)
개한테 배우다
- 복효근
동네 똥개 한 마리가
우리집 마당에 와 똥을 싸놓곤 한다
오늘 마침 그 놈의 미주알이 막 벌어지는 순간에 나에게 들켜서
나는 신발 한 짝을 냅다 던졌다
보기 좋게 신발은 개를 벗어나
송글송글 몽오리를 키워가던 매화나무에 맞았다
애꿎은 매화 몽오리만 몇 개 떨어졌다
옆엣놈이 공책에 커다랗게 물건 하나를 그려놓고
선생 자지라고 써놓은 것을 보고 킥킥 웃었다가
폐타이어로 만든 쓰레빠*로
괜한 나만 뺨을 맞은 국민학교 적이 생각나
볼 붉은 매화가 얼마나 아팠을까 안쓰러웠다
나도 모름지기 국가에서 월급 받는 선생이 되었는데
오늘 개한테 배운 셈이다
신발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고,
매화가 욕을 할 줄 안다면
저 개 같은 선생 자지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주(註) : 슬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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