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먹어도 개와는 안 먹는다 61

말을 할 줄 알아야

동물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의사소통을 한다. 하지만 사람의 말처럼 복잡한 구조를 가진 말을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간단한 생각에서부터 복잡 미묘한 감정까지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사람의 말뿐이다. 사람만이 깊이 있는 사고를 하고 또 그것을 말로 표현한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생각이다. 생각을 제대로 해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말을 제대로 해야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도 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우선 단어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령 직장에서 아랫사람이 잘못한 것을 지적하는 경우 윗사람은 “불평말고 일이나 하라.” 고 한다. 이런 경우 ‘불평’이 아니고 건전한 ‘비판’ 일수도 있는 것을 모르고 하는소리다. 어떤 여자교수는 말하다가 상대에게 “그건 오해예요.”라고 하곤 하다. 오해는 ..

입학과 졸업

오래 전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있던 시절이었다. 원하지 않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고등학교 일 학년생이 계속 재수를 해서 결국 원하는 고등학교에 합격이 되었다. 동급생들은 대학일 학년이 되던 해였다. 후에 들으니 그는 거의 폐인이 되었다고 했다. 때가 되면 마치고 졸업을 하는 것이 옳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같이 있는 교수들 중에 자신이 나온 대학에 연연해서 늘 그 시절 얘기 , 그와 관계되는 얘기만 하는 이들이 있다. 자신의 출신학교가 세칭 일류학교라서 자신을 내세우려는 뜻은 모양이지만 보기에 따라서 그는 아직 그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못된다. 이렇게 출신 학교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아직 자기형성이 안되어 있고 또 자기 비판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학교라도 장단점이 있..

단순비교

어려서 본 만화가 생각난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유명한 사람을 들먹이며 “ 그 사람은 네 나이 때 . . . . ” 어쩌고 하였다. 아들은 “누구누구는 아버지 나이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고 하였다. 단순비교처럼 맹랑한 것도 드물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주 이 단순비교의 오류를 범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단순비교 한다. “형은 어떠한데 너는 왜 . . . ,” “아무개는 일등이라는데 너는 왜 . . . .” 따위다. 남편을 보고 “누구는 월급이 얼마라던데 . . ..” 아내를 보고 “누구는 음식솜씨가 좋다던데 . . . .” 따위다. 학생들은 간혹 한 쪽의 현실과 한 쪽의 이상을 단순 비교하곤 한다. 대학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를 할 때 일이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끝나면 성적 평가를 하였다. 이때 반..

Lust와 장심(將心)

예수는 간음의 문제에 관해서 누구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lust) 이미 간음 하였다고 했다 (마태 5: 28). 여기 쓰인 ‘lust’란 단어의 뜻은 ‘꼭 그리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욕구’ 이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어떤 여자를 보고 꼭 그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욕망을 가진다면 그것은 이마 간음의 행위 즉 죄를 범한 것이라는 뜻이다. 또 이 ‘lust’의 의미는 비단 여자에게만 적용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외 재물, 명예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누구든지 무엇을 반드시 가지겠다든가, 무엇에 꼭 도달하겠다든가 하는 욕심을 가지면 그것이 곧 범죄라는 뜻이다. 그런 유의 범죄는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보아왔고, 그 결과도 보아왔다. 자신의 자리를 성실히 지켰으면 좋았을 사람이 욕심(lust)을 내어 자신..

자생력(自生力)과 자정력(自淨力)

어쩌다 우리는 자생력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됐는데 언제부턴가 자정력까지 잃어가는 게 현실이다. 얼마전 한 TV가 한 미국 가정 입양 자매를 소개했다. 가난한 부모 탓에 미국 가정에 입양되었다가 양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자매였다. 하나 그들은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란 대학생들이 되어 한국의 생부모를 찾아왔다. 자신들의 과거와 부모의 형편을 알고 싶어서였다. 자신들의 부모가 왜 자기들을 버렸나, 가난했지만 자기들을 아직도 사랑하는가 하는 것 등을 알고 싶어 왔다고 했다. 한데 그들의 언행이 어떻게나 예의바르고 생각이 어른스러운지 참 인상적이었다. 만일 반대로 미국의 한 자매가 부모에게 버림받고 한국 가정에 입양됐다가 또 버림받았다고 할 때에 과연 그들이 지금 그들처럼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

봉사

오늘날처럼 봉사가 요구되는 때도 없을 텐데 불행히도 봉사라는 말이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다. 우리말 사전에 봉사에 대한 정의가 몇 가지 나와 있는데 이들을 종합해서 한 마디로 표현하면 ‘남을 위해 헌신적으로 하는 일’이다. 즉, 아무것도 자신의 유익을 바라지 않고 오직 남을 위해서만 애써 일하는 것이 참된 봉사인 것이다. 그러니까 참된 봉사에는 무엇보다 자신의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다.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받으면 이미 봉사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교육관계부처에서 학생들의 봉사 활동을 점수화해서 학생들의 봉사심을 키우겠다고 했다. 학생들은 소위봉사 기회를 찾아야 했고 어떤 학생들은 복지 기관에서 가서 일하고 도장을 받아가서 점수를 딴다. 또 어떤 이들은 여름방학에 휴양지에서 휴지를 주워서 무게에 따라 점수..

깨끗함과 아름다움

깨끗함과 아름다움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뜻이 있다. 먼저, 아름답다는 것은 깨끗함을 전제한 한다. 그리 오래된 얘기도 아니거니와, 시골장터에 혹은 선술집에, 하얗게 분을 바른 여인들이 있었다. 한데, 자세히 보면, 얼굴에만 분칠을 했지 목덜미에는 꾀죄죄 땟국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에는 목욕을 하기가 참으로 어렵던 때였다. 학교에선 늘 용의검사를 하던 시기였으니까. 그렇다고 씻지 않고 분이나 발라서 어쩌자는 것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주위를 깨끗이 하는 마음 없이는 자신의 속에 깨끗한 마음을 가질수 없다. 또 마음이 더러운데 주위인들 청결히 하겠는가? 도산 선생이 처음 미국에 가서 교민들 사이에 펴 나간 운동은 ‘집 앞 쓸기’ 였다. 우선 주위를 청소하는 백성이라야 독립도 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참으로 선..

같기 때문에

화장실 문에 '교수 전용'이라고 써 붙인 적이 있다. 그 층에 연구실을 둔 교수들만으로도 부족한 시설에 학생들이 드나드니 혼잡하고 또 불편하기도 해서였다. 그런데도 이 부탁을 무시하고 드나드는 학생들이 많아서 한번은 청소 맡은 아주머니가 "여긴 교수님들 전용이에요."라고 넌지시 말했더란다. 그러니까 그 학생이 당장 "우리하고 교수님들하고 다른 게 뭐예요?"라고 대드는 바람에 할 말을 잊었다는 것이다. 그 학생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교수도 학생도 같은 구조의 신체 조직을 가진 같은 인간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같기 때문에 피차 분별있는 예절이 필요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과 닭은 아예 다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질서가 간단히 유지되고 호랑이와 토끼 사이는 외형적 구별은 말할 것도 없고..

삶의 원칙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성구들이 있다. 그 중에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를 깨닫게 한 성구들이 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어려서 아버지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신께 기도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였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열왕기상 3:7)" 하면서 지혜로운 마음을 주사 선악을 분별하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열왕기상 3:8). 솔로몬은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임을 받아들이고 불평없이 지혜와 총명만을 간구했다. 예수의 비유 중 열 처녀 비유(마태복음 25:1~12)가 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가 있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기름을 준비하였고 나머지 다섯은 등만 준비..

유학생활

유학생활 삼개월 여, 학기말고사 직전에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저녁 먹고 도서관에 가는 12월초의 어둑어둑한 저녁 길,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번쩍하는 자동차 전조등의 빛과 더불어 나는 공중에 떴다가 떨어졌다. 의식은 있어 어떻게 됐나 살펴보니 오른 쪽 다리가 잡히질 않았다. 알고보니 완전히 부서져서 제자리에 없고 등에 깔리다시피 위치해 있었다. 구급차로 응급실 도착, 응급처치 -무릎 위 아래에 쇠꼬챙이를 끼어 푸줏간 소다리처럼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다. 붓기가 내리기를 기다려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았다. 뼈 속에 핀(Pin)을 박고, 물리치료, 목발 짚고 퇴원, 수없이 많은 약식 재판, 뼈속의 핀 뽑는 재 수술, 2년 여의 목발생활 끝에 다리가 1.8cm 짧아지고 한 쪽 구두 굽을 높여 신는 것으로 후유..

부모 노릇이나 해라

부모노릇은 그저 살아서 자녀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으로 족하다. 원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함께 있으면 자녀들을 사랑하면서 적어도 능력 안에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스런 존재 외의 역할은 모두 욕심에서 비롯되며 모두 헛된 것뿐이라는 것을 목격하고 또 경험하였다. 첫 아이의 출산을 앞둔 부모의 심정을 되돌아보면 분명하다. 그저 건강하게 지체가 다 성해서 태어나 주기만 바라는 것이 첫 아이의 출산을 앞 둔 부모의 마음이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건강하게 정상으로 태어난 아이를 얼마나 귀여워했던가. 아이가 자라면서 보여준 재롱에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럽지 않는 것이 첫 아이의 부모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차차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앞서 주기를 바라기 시..

개는 먹어도 개와는 안 먹는다

나는 곧잘 개고기는 먹어도 개 같은 놈들하고는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고 하곤 했다. 사람 같지 않은 놈들하고 같이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느냐는 소리였다. 나의 숙부는 개를 무던히도 좋아하신다. 어려서의 기억으로밥상 옆에 개를 앉히고 밥 한술 잡수시고 개에게 한 숟갈 먹이시고 하였다. 그런 숙부의 개에 관한 생각은 “개는 개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가 훈련을 받아서 사람이 하라는 대로 척척해서는 개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오히려 오라면 가고 가라면 오고 귀찮아해도 좋다고 덤비고 해야 개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숙부께서는 무슨 족보 있는 개나 명견을 키우신 적이 없다. 그저 똥개, 잡견을 키우셨다. 고작 “앉아,” “손.” 따위의 행위를 명하곤 하셨다. 숙부의 개들은 이런 명령에조차도 그리 척척 정확하게..

머릿말

집안 어른들이나 고향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께서는 글과 그림에 뛰어나셨다고 한다. 그러나 일찍 서른 셋에 세상을 떠나시고 남기신 글과 그림을 전쟁 통에 잃어버리고 단지 시조 몇 수가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늘 이 시조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이번에 마침 기회를 얻어 아버지의 시조를 발표하게 되었다. 같이 실은 나의 글들은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적어 두었다가 정리한 나의 생각들이다. 아버지의 글을 펴내도록 독려해 주셨던 신아사의 故 정석균 사장님, 또 이 일을 현실적으로 가능케 해 주신 정현걸 現 사장님, 그리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다. 오늘은 어머니 돌아가신 지 41주년이 되는 날이다. 2002년 7월 28일 장 신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