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436

서울이라는 발굽 / 유리의 기술 - 정병근

서울이라는 발굽 - 정병근 고향에 가면 피에 겨운 어린 내가 있고 고향에 갔다 오면 나는 백 년 늙는다네 어째서 골목은 작아지는 일에만 몰두했는가 고향에 갔네 고향은 다 끝난 자세로 죽은 혈족들처럼 무뚝뚝하고 무엇이 지나갔는가 사나운 사내가 어깨를 치고 가는 거리에서 무슨 간판을 두리번거리는 나는 아무리 가도 때늦은 사람 부르는 목소리 하나도 없이 바삐 바삐 올라오는 나는 서울이라는 발굽을 가진 사람 가지 않고 올라오기만 하는 사람 영 글러먹은 사람 * 감상 : 정병근 시인. 1962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계간 신인상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2001년 에 ‘옻나무’外 9 편의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등단한 지 14년 만인 2002..

어린 봄 / 씨팔! - 배한봉

어린 봄 - 배한봉 과수원 귀퉁이 밭 일구러 갔다가 그곳이 적멸보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햇빛의 말 바람의 말 진눈깨비의 말을 기억하는 쑥 냉이 씀바귀 구만 구천 어린 나한들이 뿜어내는 초록 향기 외엔 아무것도 없는 적멸보궁 땅 깊숙이 삽날을 박으면 흙에서도 이슬 머금은 젖비린내 달빛 머금은 젖비린내 내 발목을 감고 얼굴까지 올라와서는 훅! 목젖 적시는 봄비의 옹알이 과수원 가장자리 적멸보궁에 들어 나는 소란스런 침묵으로 뛰노는 어린 봄을 만났던 것입니다. - 시집, (세계사, 2004) * 감상 : 배한봉 시인. 1962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일 정도로 느지감치 다시 시작한 시업(詩業)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학생 잡지..

죽고 난 뒤의 팬티 / '자바 자바' 셔츠 - 오규원

죽고 난 뒤의 팬티 - 오규원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者)도 아닌 죽은 자(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시집, (문학과지성사, 1981) * 감상 : 오규원(吳圭原) 시인. 1941년 12월 경남 밀양시(삼랑진읍 용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규옥(圭沃)이며 호적상으로는 1944년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산 중학교를 졸업한 후 ..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정호승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정호승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 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 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종후성(鍾後聲) / 물방울 무덤들 - 엄원태

종후성(鍾後聲) - 엄원태 鍾은 제 몸을 울려 저무는 한 해를 보내고 새날을 향해 장중한 소리를 퍼뜨렸다 종은 제 몸을 울려, 그러니까 저의 온몸을 진저리쳐 떨어댄 것이어서, 어둠속에 기 ㅡ 인 여운을 남겼다 그런 여운은 속이 빈 것들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여운은 오래 남는다 내 빈 가슴속에도 그것은 아직 남아 있다 찬바람에 몸을 맡겨 떨고 있는 버들개지의 보드라운 싹눈에도 그것은 남아 있다 오래 진저리쳐본 것들만이 그 여운의 미미한 떨림을, 소리 없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다 그 진저리침 끝에, 노랗고 새하얀 꽃망울들을 터뜨리는 개나리 목련의 봄날에 가서야 누군가는 아아, 하고 뒤늦게 그 소리를 듣는다 - 시집, (창비, 2007) * 감상 : 엄원태(본명 : 엄붕훈) 대학교수, 시인. 1955..

멈추지 마라 - 양광모

멈추지 마라 - 양광모 비가 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새는 하늘을 날고 눈이 쌓여도 가야할 곳이 있는 사슴은 산을 오른다 길이 멀어도 가야할 곳이 있는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길이 막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연어는 물결을 거슬러 오른다 인생이란 작은 배 그대, 가야할 곳이 있다면 태풍 불어도 거친 바다로 나아가라 - 시집, (이룸나무, 2013) * 감상 : 양광모 시우(詩友), 작가, 컬럼니스트. 1963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성남초등학교, 풍생중고등학교,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SK텔레콤에 근무하면서 노동조합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도서출판 목비 대표, (주)블루웨일 대표, 한국기업교육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닉네임 [푸른고래]로 다음 카페 카페지기로 활..

첫마음 /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정채봉

첫마음 - 정채봉 1월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마음으로 공부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

입춘 - 김선우 / 조병화

입춘 - 김선우 아이를 갖고 싶어 새로이 숨쉬는 법을 배워가는 바다풀 같은 어린 생명을 위해 숨을 나누어갖는 둥근배를 갖고 싶어 내 몸속에 자라는 또 한 생명을 위해 밥과 국물을 나누어 먹고 넘치지 않을 만큼 쉬며 말을 나누고 말로 다 못하면 몸으로 나누면서 속살 하얀 자갈들 두런두런 몸 부대끼며 자라는 마을 입구 우물 속 어룽지는 별빛을 모아 치마폭에 감싸안는 태몽의 한낮이면 먼 들판 지천으로 퍼지는 애기똥풀 냄새 -시집 (창작과비평사. 2000) * 감상 : 김선우 시인, 소설가.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습니다.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96년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창비, 2000), (창비, 2002), (창비, 2003..

특별한 숙제 / 병원 앞 연못 - 김현숙

특별한 숙제 - 김현숙 학교에 학생 수 점점 줄어든다고 재완이, 도현이, 요한이, 상대 정인이, 민영이, 윤지, 지수, 나 형제 없는 우릴 불러놓고 선생님은 특별한 숙제를 내주셨다 엄마한테 동생 낳아 준다는 확답 받아 오기! 그런데 숙제 해 온 친구 한 명도 없다 - 동시집 (섬아이, 2014) * 감상 : 김현숙 시인. 경북 상주의 곶감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2005년 에 동시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10년 ‘터진다 외 11편’으로 제8회 을 수상했습니다. 2013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았으며, 같은 해 제21회 을 받았습니다. 2014년에 첫 동시집 를 낸 후 2020년 12월, 6 년 만에 두 번째 동시집 (국민서관)를 냈습니다. 동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정확하게..

개천은 용의 홈타운 - 최정례

개천은 용의 홈 타운 - 최정례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 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대 놓치고, 그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

오죽처럼 - 배한조

오죽처럼 - 배한조 누가 천기를 누설했는지 초등학교 동창 밴드에 114세 96세 105세 ㆍㆍ 각기 기대수명을 놓고 분분하다. 궁금증을 못 이기고 솔직한 답과 함께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별로 하지 않으니 ...... 은근한 기대감으로 작성을 마쳤다. 76세 남은 수명 13년 4745일 왠지 모를 허탈감이 엄습한다. 몇 년을 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100세 시대라고 하니 그렇겠거니 하고 산 것이다.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입으로만 안 諸行無常, 환갑을 지나며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 살고자 했는데 갑자기 정해진 수명 앞에 이토록 어지러운 것인가. 시한부 환자를 보면서 나는 초연하리라 했던 장담이 낯 붉게 한다. 오죽잎이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하루라도 물 안 주면 말..

새해 아침 / 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새해 아침 - 송수권 새해 아침은 불을 껐다 다시 켜듯이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답답하고 화나고 두렵고 또 얼마나 허전하고 가난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지난밤 제야의 종소리에 묻어둔 꿈도 아직 소원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외로웠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억울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슬펐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얼마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위에 우레와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그 위에 침묵과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낡은 수첩을 새 수첩으로 갈며 떨리는 손으로 잊어야 할 슬픈 이름을 두 줄로 금긋듯 그렇게 당신은 아픈 추억을 지우십시오 새해 아침은 찬란한 태양을 왕관처럼 쓰고 끓어오르는 핏덩이를 쏟아놓..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 남진우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 남진우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날 낡은 수첩 한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나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구석에 밀어 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 시집, (창비, 2009) * 감상 : 남진우 시인, 문학평론가, 대학..

따뜻한 얼음 - 박남준

따뜻한 얼음 -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 겹 또 한 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 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 시집 (창비, 2005) *감상 : 박..

실어증 - 심보선

실어증 - 심보선 나이가 들수록 어휘력이 줄어든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인접적 자의성의 규칙에 따라 평소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을 훈련 삼아 적어보았다 배짱, 베짱이 사슬, 사슴 측백나무, 측면 언니, 어금니 홈, 흠 마음껏, 힘껏 벨라, 지오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생각할 때 다른 단어들도 숙고했을 것이다 달, 해, 안개, 숲, 구름 ...... 같은 것들 버려진 단어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있다 시인이 아니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 TV에 나오는 낱말 맞히기 게임에서 하나도 맞히지 못했다 철없던 시절엔 실어증에 걸리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소원이 이루어졌다 약을 먹는데 옆집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어도 말이 안 나온다 -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7) ..

엄마의 런닝구 - 배한권

엄마의 런닝구 - 배한권 작은 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링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 만하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 한다 한다. 엄마는 새 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 어린이 시 모음집 (한국글쓰기연구회 엮음, 보리, 1995) * 감상 : 이 시는 한국글쓰기연구회가 엮어 발간한 어린이 시 모음집 표제작으로 실린 시입니다. 정직한 글쓰기, 그리고 시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그 대표적인 예로 등장하는 시입니다. 1987년 당시, 경북 경산시..

회사 다니는 엄마 / 열입곱 - 유현아

회사 다니는 엄마 - 엄마의 일기장 1 - 유현아 휴대폰 진동이 울리면 심장이 벌렁벌렁 책상 위 서류들이 벌레처럼 스멀스멀 “엄마, 준비물 사야 해.” 전화를 받을 땐 꼭 회의 시간이 가까워 오고 “엄마, 몇 시에 들어올 거야?” 전화를 받을 땐 꼭 부장님이 불러 달려가야 하는 이상한 하루 할 얘기도 없다면서 오 분 간격으로 전화를 하는 아이 시도 때도 없이 문자 알람이 깜빡거리는 하루 직원들과 회의하는 동안 회사 전화 붙들고 숨 쉴 틈 없이 일하는 동안 답장도 못 해 주고 일하다 문득 돌아본 회사 유리창 눈물처럼 비가 내리네 우리 딸 우산도 없이 집에 갔겠네 수줍어 친구들에게 우산 같이 쓰자는 말도 못 하고 비 맞으며 집에 갔겠네 말 없는 우리 딸 터벅터벅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씩씩한 척하며 집에 ..

가을레슨 1 - 채희문

가을레슨 1 - 채희문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쯤은 떠나 볼 줄도 알아야지 좀 돌아서 갈 줄도 알아야지 좀 천천히 갈 줄도 알아야지 점점 높아지는 하늘 점점 얕아지는 땅 그 사이에서 점점 흔들리며 작아지는 나 새삼 느껴 볼 줄도 알아야지 떨어지는 잎, 다시 볼 줄도 알아야지 싸늘한 바람에 손만 흔들고 서 있는 나무들도, 다시 볼 줄 알아야지 좀 멀리 볼 줄도 알아야지 좀 가까이 볼 줄도 알아야지 깊은 것도 얕은 것도 함께 볼 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가을비 아침 이슬 같은 빗물로 만나 한 번쯤 썰렁한 가슴 젖어 볼 줄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쯤은... - 시집 (동천사, 1987) * 감상 : 채희문 시인. 1938년 포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동성고등학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음모陰毛라는 이름의 음모陰謀 - 김민정

음모陰毛라는 이름의 음모陰謀 - 김민정 머리털 나 처음으로 돈 내고 다리 벌린 날, 소중한 당신 산부인과에는 다행히 여의사만 둘이었다. 어디 한번 볼까요? 자궁경부암 진단용 초음파 화면 가득 잘 익은 토마토의 속살이 비릿한 붉음으로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깨끗하네요, 그런데 자궁 모양이 좀 특이해요, 뾰족하다고나 할까. 거웃 나 처음으로 내 아기집을 구경한 날, 어쩌다 뾰족한 자궁이 된 나는 콘헤드(conehead)의 아이 하나 고깔 쓴 제 머리 꼭지로 내 배를 콕콕 찌르는 상상만으로도 아 따가워 가시를 영 빼버릴 참이었는데 제모 어떠세요? 내 아랫도리를 헤집다 말고 얼굴을 쳐든 여의사가 코끝까지 밀려내려온 안경테를 걷어올리며 묻는 것이었다. 레이저 기계 새로 들여 행사중이에요, 겨드랑이 털과 패키지로 하..

어떤 통화 / 위층 사는 그 여자 - 서안나

어떤 통화 - 서안나 지하철 안에서 사내가 목청을 높인다. 아 환장해 불겄네. 뭣이라고요. 사기꾼 이라고야. 아 참말로 환장해 불것네. 내가 세금 꼬박꼬박 내고 착하게 살아 불고 나쁜 짓은 안 해봤는디 사기꾼이라고요. 아따 선상 아무리 세상이 각박혀다고 혀도 내가 신용불량자가 되었기로서니 말씀이 너무 심허시오. 나도 처자가 있는 사람인디. 다음주엔 꼭 보내준다고 허지 않소. 나도 거짓말은 싫어하는 사람인디. 세상이 날 거짓부렁하게 맹근다 안 하요. 그 머시냐 문어 대가리 같은 김 사장이 부도만 안 내부렀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소. 기다려 달라고 암 생각 없이 그 말을 믿은 게, 신용사회를 믿은 게 내 잘못이구만. 뭣이라고요. 내일까지 갚아야한다는 말이요. 아, 참말로 환장해 불겄네. 내 말을 콧구멍으로 들..